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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사위 놀이터로 간다

[ 잘 놀 줄 아는 사람 ] 03

by 정원에 Mar 11. 2025
[ 잘 놀 줄 아는 사람 ] 은 ‘삶=놀이’라는 사유의 탐험이다. 일과 삶, 삶과 놀이, 놀이와 내가 분리된 상태를 들여다 보고 제대로 놀 줄 아는 삶의 방향을 찾는 여정이다. 일상을 지키면서 재미와 의미가 넘치는 시간 속으로. 가짜 나로 인정받는 것보다 진짜 나로 미움받는 게 더 이득인 삶의 실천을 위하여! 


브런치 글 이미지 1

저는 주사위 놀이를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좋아해요. 틈(?)만 나면 주사위를 굴려요. 순서를 정할 때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보드게임인 '딕싯'을 할 때도. 그냥 '멍 때리기'를 할 때도. 


한 개가 아니라 공깃돌처럼 여러 개를 동시에 굴리는 것을 더 많이 좋아합니다. 굴리고, 던진 후가 더 흥미진진해서요. 


그 짧은 시각동안 생의 짜릿함을 반복적으로 느끼는 놀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 싶어요.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런데 이 주사위 놀이. 알고 보니 그 역사가 엄청 오래예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눈을 감고 사람들이 광장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보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 사이에 저도 끼어 앉아 신나게 주사위를 던지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허공을, 구르는 주사위 면면이 보여요. 떴다 떨어지는 주사위들의 소리가 들려요.


이렇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은 현대 철학에서 놀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출발점 역할을 한 니체 덕분입니다. 그가 놀이 철학의 근원으로 삼은 이가 바로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이거든요. 


니체는 왜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한 헤라클레이토스를 놀이 철학의 원류로 삼았던 것일까요? 그는 그 해답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장기) 놀이하는 아이'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놀이는 흔히 도덕적이지 않고, 본질에서 벗어난 현상으로 치부하면서 철학적 논의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놀이하는 아이'를 들여다보면서 놀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놀이를 '해석'하는 주체의 가치 평가가 문제라고 바라봐요.


여기서 '장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놀이가 아닙니다.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와 결합된 보드 게임을 의미합니다. 디오니소스의 신화에서 거인족이 어린 디오니소스를 장난감으로 유혹하는데, 그때 구슬, 팽이와 함께 등장한 바로 그 주사위이죠. 


주사위 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공중에 던지고 난 후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게 미리 확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만 할 뿐이죠. '자유'가 충만하게 작동하는 상상입니다. 이 상상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연'입니다. 


특히, '우연'은 모든 놀이의 시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죠. 이것이 지금의 우리처럼 그리스 광장에 둘러앉아 보드 게임을 하던 '(장기) 놀이하는 아이'들이 기대했던 (유일한) 결과인 것이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놀이를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 점을 니체는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오지 않은 미래(중세, 르네상스, 계몽시대 )를 관통할 종교적, 도덕적, 과학적 인간 이외에 우연, 상상, 자유 등의 가치가 인간성의 한 요소로 수용(주1)되었다는 뜻입니다.

주1> 정낙림,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2017, 책세상  


니체는 놀이를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원으로 봤습니다. 르네상스에서 계몽시대로 곤두박질친 인간성을 찾기 위한 예술활동'미학'이라는 범주 속에서 해석해 내는, 가치 평가를 하는 방식으로요.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사위 놀이가 세계를 가볍게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현대 사회에서 다시 놀이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기존의 중심이 해체되고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하는 아이'는 현대의 변화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행위 주체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대철학에서 현대 사회를 '놀이터'에 비유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노동이 인간성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생존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은 변함이 없죠. 노동의 기본이 외적 강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놀이는 생존 수단을 해결해야 할 전제적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놀아야만 한다'는 외부의 강요가 없으니까요. 


개인의 명예보다 물질적 보상이 우선되는 모든 활동은 놀이가 아닌 것이죠. 마치, 월계관과 사회적 명예가 올림픽에서의 승리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놀이는 노동과 달리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주사위 놀이 자체가 놀이인 것처럼요. 효율성을 추구하는 노동에 비해 놀이야 말로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활동입니다. 




놀이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놀고 있는데(작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생활의 즉각적인 필요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 행동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 모든 놀이는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놀이의 본질이 '본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놀이를 가리켜 '의지' 혹은 '의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많이 말해 버린 것이 된다. 우리가 놀이를 어떻게 보든 간에, 놀이에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놀이의 본질 속에 비(非) 물질적 특징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주2)

주2> 요한 하위징아, 호모루덴스, 2018, 연암서가




오늘도 어김없이 주어진 '오늘'. 생전 처음 사는 오늘을 위해 저는 주섬주섬 주사위를 가득 담아 넣습니다. 오늘 하루도 알록달록, 울퉁불퉁한 주사위를 잘 굴리면서 내가 나를 나로 지켜내기 위한 놀이에 몰두해 보려 합니다. 주사위 놀이터에서 만날 주사위 놀이하는 아이들을 만날 기대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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