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너희들이 다 커버리니 아빠는 이제야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너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이 (쫌)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너희가 사는 세상을 보며 내가 배우는 게 더 많거든.
언젠가 네가 이랬었지? 그곳과 이곳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야.
“그곳은 재밌는 지옥이라만 이곳은 지루한 천국인 것 같아요. 그래도 천국이 좋죠!”
천국과 지옥. 어느 곳이 더 ‘민주적’인 곳일까? 오늘 편지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해.
인간이 만든 제도중에 그 어떤 게 완벽하겠니?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지. 나와 너희가 공간은 다르지만 마음껏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최고의 제도라기 보다는 최악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란다.
그래서 권력을 세세히 쪼개고, 법과 도덕, 양심과 인간의 기본선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통해 서로 감시하고, 의사 결정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었지. 어느 누군가가 세상과 사회를 주도하지 못하고,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지루한 회의와 투표, 설득과 타협의 절차를 밟아야 드는 그 과정이 결국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주는 것이지. 그리고 그 민주적인 안전함의 대가가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지루함(따분함)’이란다.
그런데, 이건 우리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다. 젊은 날의 아빠는 솔직히 말해서 내 인생이 블록버스터 영화 같기를 바랐다.
매일매일이 극적이고, 가슴 뛰고, 내가 세상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알겠더라. 인생이라는 장르에서 스펙터클과 서스펜스는 관객으로 볼 때나 재밌지, 주인공이 되면 피가 마른다는 걸.
너희에게 미리 해주는 인생 스포일러가 하나 있다. ‘정말 좋은 삶은, 남들이 보기에 꽤나 심심해’ 보이는 삶이라는 것!
우리는 종종 “아, 지루해 죽겠네”라고 투덜거리지? 그런데 그 지루함이 실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얻어낸 ‘평화의 영수증’ 같은 거란다.
생각해 보자.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비슷한 밥을 먹고, 저녁에 별일 없이 TV를 보거나, 뒹굴거리는 이 루틴이 때론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하지만 그 ‘따분한 울타리’가 튼튼하게 서 있기 때문에, 실직이나 파산, 질병, 사고, 범죄, 전쟁 같은 ‘괴물’들이 우리 집 문턱을 쉽게 넘지 못하는 거란다.
민주주의가 최악을 막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두듯이, 우리 삶도 최악을 막기 위해 ‘성실함’이나 ‘인내’ 같은 지루한 절차를 두는 것 같아. 그래서 ‘권태’는 무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아주 안전하게 잘 운용하고 있다는 ‘안전 인증 마크’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예전엔 너희가 최고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어. 최고를 지향하다가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보다, 최악을 방어할 줄 아는 지혜로운 겁쟁이가 되는 게 훨씬 낫다는 걸 깨달았거든.
여기서 아빠의 고민이 하나 있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니?
요즘 세상은 너무 ‘도파민’ 중독이잖아. 자극적이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너희가 이 ‘소중한 지루함’의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혹시 아빠가 너무 쫄보처럼 보이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빠는 확신한다. 가끔은 맹물처럼 밍밍한 이 일상이, 사실은 가장 갈증을 잘 해소해 주는 생명수라는 걸. 우리 가족이 큰 뉴스에 나오지 않고,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지 않으며, 오늘 저녁 메뉴 따위로 고민하는 이 ‘노잼’ 상태야말로 신이 주신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그러니 아이야.
지금 너희의 삶이 별.일.없.이. 심심하다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렴.
너희는 지금 ‘최악’을 아주 훌륭하게 방어해 내고 있는 중이니까. 아빠는 너희가 롤러코스터 타는 영웅보다, 튼튼한 벤치에 앉아 조는 행복한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무리 재밌는 지옥이 되어가도, 우리는 꿋꿋하게 심심한 천국을, 지루할 권리를 지키자꾸나. 너희의 삶에서 그것들을 지켜낼 방법을 찾아 스스로 싸워내라. 그게 아빠가 너희에게 물려주고 싶은 진짜 정신의 유산이란다.
너무 사랑한다.
나의 가장 평범하고 위대한 시민 영웅들아.
p.s
오늘 저녁, 친구나 연인 혹은 너 혼자라도 평양냉면(혹은 아주 슴슴한 나물 비빔밥)을 먹으러 가거라. 단, 식초나 겨자를 ‘절대’ 치지 말고, 그 밍밍하고 심심한 국물 맛을 3번 이상 음미할 것. 그리고 앞사람에게 “아, 이 맛이 바로 평화의 맛이지”라고 허세 한번 부려볼 것!!
만약, 너무 힘들어(!) 불닭을 먹더라도, 엽떡을 먹더라도 “역시 자극적인 게 최고야”라는 말은 속으로만 내어 보면서, 너의 영혼을 제대로 속여 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