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 아빠의 유산 ] 61

by 정원에

아이야.


식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덮으며 ‘정신의 등기권리증’이란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남매들을 생각하다 보니.

흔히 부모가 자식에게 남기는 유산이라고 하면 통장 잔고나 부동산 등기권리증 같은 걸 떠올리겠지만, 세금 폭탄이란다. 하지만 이 ‘정신의 등기권리증’은 세금도 안 붙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없는 거야.

우리는 흔히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진짜 세상’이라고 믿으며 산다. 하지만 아빠가 책을 읽고, 또 책밖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건, 우리는 세상을 맨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두 저마다의 살아온 경험-그것이 길고, 짧든, 깊고 얕든 관계없단다.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자기 확신’드는 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거든 - 이라는 ‘필터(Filter)’를 눈에 끼고 세상을 본단다.


생각해 보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데이트 약속이 있는 사람은 <아, 옷 다 젖겠네. 우울해>라고 짜증을 내지만, 가뭄 끝에 비를 기다리던 농부는 <아이고, 이제 살았네>라며 춤을 출거다.


비는 그냥 물방울의 낙하 운동일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재난이고 누군가에게는 축복이 된다. 그것은 세상이 변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낀 ‘안경’이 다른 탓이지.

아빠도 젊었을 땐 내가 쓴 안경이 유일한 정답인 줄 알았다. 내가 쓴 안경이 ‘성실함’이라는 필터라고 믿었기에, 잠시 쉬는 사람을 보면 ‘게으름’으로 보였고, 내가 ‘절약’이라는 필터를 끼고 있으니, 너희가 맛있는 걸 사 먹는 즐거움이 ‘낭비’로 보였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건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 색안경에 김까지 서려 앞이 잘 안 보였던 것뿐인데 말이다.

여기서 아빠가 전하고 싶은 건 이거다.


절대적인 진짜 세상이 무엇인지 찾느라 애쓰는 대신 ‘지금 내가 끼고 있는 이 필터가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가?’라고 자꾸 물어보렴.


만약 세상이 온통 억울하고, 화나고, 시커멓게만 보인다면, 그건 세상이 정말 지옥이라서가 아니라 네가 무의식중에 ‘피해의식’이라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럴 땐 세상과 싸울 게 아니라, 조용히 네 콧등에 걸쳐진 선글라스를 벗어 닦거나, 좀 더 밝은 색 렌즈로 갈아끼우면 그만이다.


아빠가 겪어보니 가장 위험하고도 웃긴 필터는 ‘공복 필터’더라. 배가 고프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적군처럼 보이고, 너희를 아끼는 이의 잔소리가 전쟁 선포처럼 들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다슬기 가득한 된장찌개에, 포슬포슬한 밥 한 공기 든든히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그 잔소리가 ‘걱정’으로, 사랑의 세레나데로 들리는 기적을 맛보곤 한다.


‘지혜’롭다는 건 별거 아니다. 그것은 거창한 진리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배고파서 짜증이 난 건가, 아니면 진짜 화낼 일인가?’를 구분할 줄 아는 능력, 바로 그것이란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야.

너희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 어떤 상황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울 거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억하렴.

그 고통조차도 ‘성장’이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근육통이 되고, ‘비관’이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골병이 된다는 것을.


아빠는 너희에게 언제든 네 마음의 렌즈를 갈아끼울 수 있는 ‘마음의 기술’을 물려주고 싶다.


스스로 필터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너희의 세상이 언제나 너희를 지키고 살리는, 건강하고 생생한 색감이기를 바란다.



p.s. [ 이번주 통쾌한 미션 ]

지금 당장 너를 가장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딱 하나 떠올려 보렴. 그리고 그 상황에 ‘시트콤 주인공 필터’를 끼워 봐. 즉, <저 상사는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시청률 올리려고 악역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수행 중이구나!>라고 생각해 보기. 얼마나 자기 역할에 열연인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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