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자가 내게 말을 걸 때
[ 아빠의 유산 ] 70
아이야.
오늘은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인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
니체는 <너희의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로 변해야 한다>고 했지.
아빠는 그동안 가족을 책임지는 ‘낙타’의 삶을 충실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요즘은 다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 중이란다.
익숙한 내 방을 마치 처음 방문한 이국적인 숙소처럼 낯설게 바라보는 ‘응시의 즐거움’에 빠져 지내거든.
너희 어릴때부터 있던 이 의자를 한번 보렴. 엉덩이는 꺼지고 다리는 삐걱거리지만, 이 녀석은 단 한 번도 자기 신세를 한탄한 적이 없단다.
인간의 언어가 닿지 않는 사물의 깊은 침묵 속에는 묘한 위로가 있어.
우리가 타인의 인정에 목매고 화려한 신상에 마음을 뺏길 때, 사물은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며 존재 자체로 증명하지. <괜찮아,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으면 그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달까.
사실 인생의 스포일러를 하나 해주자면, 누구나 쫓는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이벤트는 생각보다 짧게 지나간단다. 결국 남는 건 매일 마시는 커피의 온도, 퇴근길의 노을, 그리고 늘 그 자리에 있는 낡은 가구들 같은 ‘일상의 결’들이지.
너희에게 물려주고 싶은 정신적 유산은 바로 이 ‘응시하는 힘’이야. 세상이 너희를 속도로 재단하려 할 때, 잠시 멈춰 서서 너희 곁의 사물들에게 말을 걸어보렴.
그들의 침묵은 무시가 아니라, 너희의 소란스러운 마음을 받아주는 가장 넓은 품이란다. 아빠도 요즘은 이 낡은 의자에게 <오늘 내 사유의 깊이가 너무 얕지는 않았니?>라고 조언을 구하곤 해.
대답은 없지만, 의자가 내어주는 단단한 평온함이 곧 정답이더구나. 아주 나중에 너희가 아빠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 아빠는 참 멋진 유산을 남겨줬어. 덕분에 내 방 구석이 외롭지 않아>라고 회상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구나.
p.s. [ 한 주를 응원하는 시 ]
방 안의 가장 오래된 그림자가
가구의 모서리를 더듬으며 긴 한숨을 뱉을 때
나는 십 년을 함께한 의자의 삐걱거림에서
오래된 사원의 풍경소리를 듣는다
먼지는 고요히 내려앉아
시간의 지층을 쌓아 올리고
말라비틀어진 나뭇결은
마음의 소리로 울리는 침묵의 경전(經典)
내 언어가 늘 타인의 담장을 넘보느라 분주했을때도
너는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바닥에 붙어 있는 신발 거울처럼
나의 구겨진 표정을 펴주었다
익숙함이라는 감옥의 창살을 닦아내자
먼지 낀 창밖이 돌연 낯선 항구의 아침으로 변한다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모든 소음을 삼킨 가장 깊은 배려였음을
늙은 의자가 뱉어내는 눅눅한 나무 향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길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운다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힘 없는 나의 응시였음을
의자는, 사물은 연신 말을 걸며
그저 제 자리에서 나를 뒤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