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
최근 연출했던 디즈니의 <피노키오>가 매우 전형적이고 안일한 기획이라 그랬던 것인지, 갑자기 로버트 저메키스의 창작욕과 실험정신이 다시금 불탔던 모양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신작 <히어>를 통해 이야기내내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으며 오직 한 공간만을 집요하게 담아냄으로써 스스로의 영화적 욕망을 분출했던 듯 싶다.
제목 그대로 <히어>는 오직 한 공간, '이 곳'만을 다룬다. 그것은 비단 집에서 그치지 않는다. 갑자기 무슨 테렌스 맬릭의 영향이라도 뒤늦게 받은 건지, 로버트 저메키스는 그 공간을 공룡들이 뛰노는 시대부터 다뤄낸다. 마음 같아선 아예 텅 빈 無의 공간에서부터 시작해 아마 천지창조 빅뱅 개벽의 순간부터 담아내고 싶지 않았을까. 다행히라면 다행히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욕심이 거기까진 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이야기부터 벤자민 프랭클린을 필두로 한 미국의 영국 식민지 시대 등등을 거치며 <히어>는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어낸다. 재밌는 건 진짜 물리적으로 묶어내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 땅을 뛰놀던 공룡들이나 그 공터에서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던 아메리칸 원주민, 가족들과 갈등했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거쳐 한 과부, 발명가 남편과 춤꾼 아내, 그리고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와 마가렛까지 모두 그 공간이란 공통점만을 공유할 뿐 그 이상의 내용적 교집합이 전무해보인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좋았다. 물론 그들 모두의 이야기가 단일한 교훈으로 모두 이어져있었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다른 맛의 재미가 있었을 테다. 훨씬 더 영화적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한 공간만을 공유한채 각자 산개해나가는 인물들의 삶이 훨씬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내가 이사 온 집에 살면서 직전까지 이 집 살던 전 주거인이랑 교집합 생길 게 뭐가 있어, 그래봤자 진짜로 그냥 그 집 하나 뿐인 거지.
더불어 영화의 이런 묘사 때문에 우리네 삶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화산이 폭발하고 천지가 개벽하며 공룡들이 뛰어놀다 참으로 여러 사람들과 여러 시간들을 거쳐 단일한 이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마주보게 된 '우리'란 존재. 그게 갑자기 너무너무 소중해보였다. 이토록 넓은 우주, 이토록 장대한 역사 속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딱 하나의 공통점으로써 마주한 우리. 생각해보라, 우주는 정말이지 넓고 역사는 정말이지 길다. 그런데도 우린 지금 함께 여기에 있지 않은가. 우리, 지금, 여기. 그게 기적이다.
한때 끝내주는 가족 오락 영화들을 만들던 감독이란 것 외에 사실 요즘의 로버트 저메키스에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기억을 되돌려보니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 만큼이나 시간이란 개념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포레스트 검프>는 한 남자와 미국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배열해낸 영화였고, <캐스트 어웨이>는 삶에 공백이 생겨버린 이후 뒤늦게 복귀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빽 투 더 퓨쳐> 시리즈에선 아예 과거와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하기도 했었지. 로버트 저메키스의 그 방식을 떠올려보니, 이번 <히어>가 그래서 더 특별히 느껴졌다. 제목은 '여기'이지만, 사실상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써의 '여기'였을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