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니 May 24. 2020

마지막 월급이 동났다

지속가능한 백수 생활을 위하여

1.

퇴사 전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이 다 떨어졌다.

이제 이번달 카드 값을 결제하고 나면 내 손에 남는 건 퇴직금뿐이다.

자취방에 친구가 들어오기로 한 계획이 미뤄지면서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바람에 더 빨리 써버렸다.

애초에 바로 이직을 계획하고 퇴사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수중에 돈이 줄어가니 불안함이 몰려온다.


통장 잔고와 카드 고지서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이 급해진다.

물론, 퇴직금이 있으니 앞으로 몇 달은 거뜬할 것이다.

그런데 왠지 퇴직금만큼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

퇴사 후 받은 이 목돈이, 뭐가 될지도 모를 마지막 도전을 위한 밑천 같은 느낌이라서.


갑자기 채용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차마, 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서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지원했다.

하루, 이틀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오지 않는 날이 늘어가자 마음이 타들어간다.


나, 괜히 퇴사한거 아냐?

퇴사 후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리프레쉬도 되고 첫 걸음은 좋았다.

브런치 작가에도 합격해서 꾸준히 글을 올리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아요도 받고, 구독자 수도 한 명 두 명 늘리고

마음 맞는 분과 서비스를 기획하기 위해 열심히 회의하고, 조금씩 실현해가고

그래서 앞으로는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풀릴리 없다.

아주아주 초창기 스타트업에 잠깐 들어갔다가 이건 아닌데 싶어서 금방 나왔고,

그 이후 지원하는 곳마다 낙방이다.

'내년이면 서른인데.' 

올해 안에 뭐든 승부를 봐야한다는 압박감이 갑자기 실체적인 무거움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2. 

결국, 원치 않는 회사의 면접을 봤다.

먼저 오퍼가 온 동종업계 상품개발팀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와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새로운 면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면접을 봤다.


어떤 직무를 원하냐길래,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기획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 회사에서는 기획은 경영진에서 하고, 실무진은 진행만한다는 걸 들어서 알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나에게 왜 꼭 기획을 해야하냐고 묻는다.

 

그러다보니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자꾸 기획을 하고 싶은 이유를 어필하게 됐다.

하고 싶은건 맞는데,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으려니까

엄청 기획이 하고 싶은 사람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거창한게 아니다. 

내가 만드는 제품이 누가 사용하게 될지 상상하면서 만드는 기쁨, 회사가 아니라 세상에 조금의 이득이라도 되고 있다는 일말의 뿌듯함 같은 것이다.

 

내가 기획만 하겠다고 지원한 것도 아닌데, 꼭 기획을 해야되냐는 얘기만 집요하게 하다가 면접시간을 보냈다. 

차라리 그런 업무 분장에 대해 터놓고 말하고, 내 경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좋은 면접 경험이 됐을텐데.

면접 보는 내내 방어만 하다가 끝났다.


3. 

애초에 퇴사하고 바로 취업하려고 했던건 아니었다.

그런데 퇴사를 하자마자 바로 코로나가 터지면서 (뭐가 됐을지도 모를)계획이 틀어지고

천천히 시간을 가지며 나의 앞날을 고민해보려던 당시의 결심과는 달리,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다.


밤마다 생각한다.

퇴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건 아니다.

그럼 난 지금 행복한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앞으로 내가 하고싶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나?

그것도 아니다.


결국 난 퇴사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없는건가,

원래 인생은 이렇게 불행한거였나 -

이런 생각들에 휩싸였다.


누우면 5분만에 곯아 떨어지던 내가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가슴답답과 호흡의 어려움까지 느끼게됐다.

잘 먹는데도 속이 안좋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마다 왜이렇게 살이 빠졌냐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려고 퇴사한게 아닌데, 나는 왜 퇴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사는걸까.


그러니까, 난 행복하게 살고싶어서 나온건데.

사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 적이 없어서, 언제나 미래를 위해 지금을 인내하는 삶에만 익숙해져서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다.


그래서 당장의 기쁨을 찾아보기로 했다.

훗날 돌아봤을 때 29살에 했으면 좋았을 걸 - 하고 생각할 것들.

간단한 것들이지만 피어싱을 다시 뚫고, 네일을 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미루어두었던 글도 꾸역꾸역 써내려가고있다.

사실 이 글도 4월에 써놓고 마무리하지 못했던 글이다(지금은 5월 말..).

지금 지원한 회사들까지 모두 탈락한다면,

내가 쓴 글들을 모아 '팔리지 않아도 좋을 책'을 독립 출판 해볼까하는 생각도 든다.

참, 면접 봤던 동종업계 회사는 최종 오퍼까지 받았지만 결국 안가기로 했다.


아직은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때로는 뭘 잘하는지조차 모르겠다.

10대와 20대 초반에 더 깊게 했어야 할 고민들을 미뤄둔 탓이겠지.

하지만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의미를 갖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를 지속가능한 백수 생활을 위하여.

이전 10화 코로나 사태에 퇴사한 사람의 우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