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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May 14. 2020

코로나 사태에 퇴사한 사람의 우울

퇴사 D+16 이건 뭔가요

2020. 03. 14 의 기록


1. 본가로 들어간다는 것

 

회사 팀원이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싸서 본가로 왔다.

그래도 같은 서울이지만, 퇴사생으로서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자취하면서 가끔 본가에 오면 그렇게 편안하고

출근을 위해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척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살려고 집에 들어오니 또 그 나름대로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2년 전 취업준비할 때로 돌아갈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경제력도 없이 부모님께 기대면서 나이는 또 성인이랍시고 간섭받는게 싫어 그 사이에서 계속 부딪히게 되지는 않을까,

일어나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가, 오후 시간이 되어서야 밍기적 거리던 시간을 저주하며 일어나서는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내일을 기약하고 또 다시 새벽까지 밤을 지새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지는 않을까.


본가에서는 쉬었다간 기억이 더 많다.

성인이 된 이후 내 삶의 터전은 학교 근처, 회사 근처, 혹은 외국 - 부모님의 집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이 곳에서 내 생활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2. 분노와 불안

 

코로나 사태로 내가 신청했던 특강도 취소되고, 새로운 교육을 신청해서 들을 용기도 안나고. 당분간은 유튜브나 오픈소스 강의를 들으며 혼자서 어떻게든 진로를 탐색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계획을 짜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 만큼 힘이 나지 않았다. 도서관이나 카페라도 가고싶은데.

3월초, 한창 확진자가 수백명씩 늘어가고, 누적 확진자가 천 단위로 기록을 갱신할 때였다. 절대 나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에만 있으려니 계속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슬슬, 2년이나 일했는데 그 마무리로 여행도 못가고 이러고 있는 현실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안좋은 타이밍에 퇴사를 했는데, 내가 다니던 회사는 계속 재택근무를 연장하고 있다. 차라리 퇴사를 안했다면 본가에서 재택근무도 하고 저녁에는 강의도 들으며, 지금 하려는 것들을 다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2년 동안 참고 참으며 다니다가, 겨우 용기내서 퇴사를 했는데 왜 하필 지금인거지. 이렇게 손해를 본 건 둘째치고 앞으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있기나 할까.


어디 나갈 수도 없어서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데, 우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 찔끔찔끔 진도를 나가며 듣는 코딩과 일러스트 강의는, 들을 때마다 역설적으로 자괴감을 일으켰다.

이렇게 조금씩 해서 결국 난 뭐가 되려는 걸까.

 

3.  도피처

 

나는 평소에 드라마를 잘 안 본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것만 미친듯이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하고 나서도 드라마 정주행만큼은 안하려고 했는데, 우울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자발적 중독에 빠졌다.

그렇게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 하고, 안보던 웹소설도 처음으로 봤다. 그것도 장장 300편이 넘는 대하소설을.


그렇게 몇 날 며칠은 TV 앞에서 혹은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박고 지냈다.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회사 사람들이 가끔 뭐하고 지내냐고 물어볼 때는 괜히 창피한 마음에 얼버무려야했지만, 아예 포기하고 다른 세상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게 약 2주 동안은 허구의 세계와 코로나 뉴스에만 파묻혀 지냈다.


그러다가 대구 경북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질 무렵, 그러니까 구로 콜센터가 터지기 직전즈음부터 괜스레 나도 기대감에 부풀어 - 코로나가 어쩌면 금방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4. 현재(그러니까, 3월 중순)

 

구로 콜센터 집단 감염이 발발하면서, 수도권 지역에 코로나 공포가 다시 시작됐다. 하루하루의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대구 신천지 집단 감염을 지켜보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거의 자포자기의 마음이 들었다.

수도권은 인구밀집도도 너무 높고 대중교통이 너무 많기 때문에 특정 지역을 피하는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정례브리핑에서 매번 이야기하듯, 개인 위생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수밖에.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할까.

얼른 수업도 듣고 싶고, 스터디도 하고 싶고, 일하면서 못갔던 서울 곳곳을 놀러 다니고 싶다.

이십대 끝자락에서,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 세계적인 난국 속에서 앞으로의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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