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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e Oct 27. 2024

장래희망: 피아니스트

1994-2020

1994–2000

Beethoven Bagatelle, WoO 59 "Für Elise"


피아노와의 첫 기억은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동네에 있던 작은 교습소에 갔을 때다.

내 몸을 중심으로 양손의 엄지가 도, 두 검지가 레, 중지가 미, 이렇게 대칭으로 연주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왼손 새끼손가락과 오른손 엄지가 도, 왼손 약지와 오른손 검지가 레, 왼쪽에서 오른쪽, 양손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언제 학교에 가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오후 2시 15분은 교습소에 가는 시간이었다.

히피 스타일의 선생님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짚어주던 모습, 고학년 오빠가 빠른 곡을 치면서 악보를 착착 넘기는 묘기를 구경하던 기억, 오늘은 무얼 배웠고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를 재잘거렸던 나를 뒤로 하고 우리 딸은 선생님한테 자로 손등을 맞아서 울면서 왔다는 옆집 아주머니 말에 괜히 미안해하던 엄마 얼굴까지.

새로이 겪는 흥미로운 일들, 연습하며 느낀 작은 성취감들, 그 가운데서 언제나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로 답해주는 피아노를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됐다.


집이 어려워져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던 중에도 부모님은 어떻게든 피아노 학원에는 보내주셨다.

어느 학원을 다니든 피아노를 많이 치고 싶어서 연습 한 번에 한 번 칠하는 진도 카드의 동그라미를 서너 조각으로 나누어 색칠했다. 연습을 마친 친구들이 학원 마당에서 땅따먹기나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하고 있으면 나는 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깍두기가 되곤 했다. 2년 간 아빠와 떨어져 제주 친척 집에 사는 동안 위축되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또래보다 키도 목소리도 작은 날 대신해 피아노는 큰 소리를 내주었고 피아노를 치는 내가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언니 오빠들이 연습하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귀동냥으로 따라 치며 아직 배우지도 않았던 페달을 몰래 밟으면서 칠 때면 꼭 내가 피아니스트가 된 것 같았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더 피아노에 의지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육지로 올라와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사를 다니는 바람에 콩쿠르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학원에서 하는 향상음악회에는 참가할 수 있었다. 체르니 30번 중 한 곡을 쳤는데 학원에서 딱 두 명 받는 피아노 모양 배지를 6학년 언니와 함께 받은 것이 두고두고 자랑스러웠다. 집안 사정이 더 이상 피아노를 배우기 어렵게 되었다. 학원 원장님이 레슨비를 안 내도 되니 그냥 보내 달라고 하신 걸 우연히 들었는데 내가 거절했다. 주눅 든 어린 마음은 또래들과 다른 배려를 받는 게 피아노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이별이었고 여러 날 울었다.

그렇다고 피아노를 안 칠 수는 없었기에 친척집이나 학교 음악실, 동네 교회처럼 피아노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고 갈증이 점점 커졌다. 그러던 차에 학교에서 열리는 반 대항 합창대회라는 기회가 생겼다. 교실에 있는 풍금을 차지하기 위해 반주자를 지원했고, 집에서 멜로디언으로 몇 번 멜로디를 따라 쳐본 실력으로 반 친구들 앞에서 박자가 엉망인 괴상한 곡을 진지하게 선보이고 탈락했다.

탈락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피아노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피아노를 찾아가려 할 때에 생기는 변수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할지, 찾아갔지만 문이 잠겨 있다든지, 아무도 없어 무섭다든지, 허락을 구하지 못한다든지, 눈치가 보인다든지 하는 것들은 피아노를 찾는 일을 조금씩 포기하게 했고 그 후로도 몇 년은 여전히 장래희망을 피아니스트라고 썼지만, 피아니스트를 꿈이라 말하는 사람 중에서 피아노로부터 아마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Beethoven Bagatelle in A Minor, WoO 59 "Für Elise"



2001 – 2003

Chopin Nocturne Op. 9 No. 2


중학교에 들어가니 음악 선생님은 성악을 전공한 분이었고 음악 시간 반주자를 구했다. 반주자의 역할은 간단했다. 매번 수업 시작할 때 합창하는 <고향의 봄> 반주를 하는 거였다. 그 밖에는 간단한 코드로 기준 음을 잡아주는 정도만 하면 됐다. 마침 나는 세련되게 편곡된 고향의 봄 악보를 외우고 있었고 그 덕에 음악 시간마다 고향의 봄 반주를 할 수 있었다.

피아노를 하지 못하는 대신 하모니카, 팬플룻, 가야금, 클래식 기타 같은 악기들을 기회만 생기면 익혔다. 기본 음악 지식이 있었기 때문인지 습득이 빨랐지만 그만큼 금방 흥미를 잃었다. 고유의 음색들은 매력적이었지만 연주가 피아노에 비해 재미없었고 피아노로 표현하는 만큼의 음악을 구현하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더 높은 수준으로 가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이라면 그건 피아노에만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서울로 전학을 왔고 이곳 음악 선생님도 성악 전공이셨는데 약간 독특한 분이었다. 음악 수행평가 주제가 다룰 수 있는 악기로 연주하는 자유곡이었다. 모두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좋은 과제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였다. 음악 선생님이 ‘쇼팽 녹턴’(Op. 9 No. 2)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내신 관리라는 핑계 김에 6년 만에 다시 피아노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한 달 동안 학교를 마치면 피아노 학원에 갔다. 일정한 시간에 피아노를 만나러 가는 것,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을 공부하고 한 곡을 온전히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연습할 수 있는 것, 선생님이 선보이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보는 것, 모든 것이 좋았다.

시험 날, 음악실 피아노가 학생들을 향해 있었기에 등지고 연주를 했다. 떨지도 않고 연주를 기쁘게 마쳤는데 자리로 돌아와 친구와 한 마디를 주고받았다가 태도 점수에서 한 번에 10점이 깎였다. 며칠 후 교실 앞에 실기 점수표가 붙었고 나는 원점수에서 10점 깎인 90점이었다. 원점수로 따졌을 때 100점은 나 하나였다. 억울했지만 연주로만 따지면 100점이니 그걸로 됐다. 무엇보다도 10점을 잃게 한, 연주를 마친 직후 들었던 친구의 속삭임은 10점과 다시 바꾸래도 바꾸기 싫었다. "CD 틀어놓은 거 같았어."


피아노학원에 한 달 다니는 동안 교복을 입은 내 또래의 입시 레슨을 종종 구경했다. 나도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입학시험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학원 선생님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입시를 넌지시 제안했지만 전공할 생각은 없다고 잡아뗐다. 사정을 설명하는 것보다 내가 뜻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남몰래 입시요강을 찾아봤고 남은 몇 달 학원에 다니면 시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듣기로 피아노 전공은 돈이 많이 든다 했다. 피아노만 하고 살 만큼 누구보다도 좋아하는가에도 확신이 없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 피아노를 더 가르치지 않으신 건 나에 대한 다른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부모님을 이해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피아노만 보면 반색하는 것을 보고 부모님이 디지털 피아노를 사주셨다. 건반이 멜로디언만큼 가볍고 88개가 안 되던 가짜 피아노였다. 미처 다 배우지 못한 체르니, 소나티네, 명곡집 몇 곡, 인기 있는 뉴에이지 곡들을 혼자 익혀볼 수 있었다.

가짜 피아노를 보면 슬펐다. 내가 치는 대로 음을 내줘서 고마운 한 편, 원하는 소리가 아니어서 밉고 세게 쳐도 여리게 쳐도 같은 크기의 소리가 나는 게 싫고 나한테 구박받는 것이 불쌍했다. 애증의 가짜 피아노는 언제부턴가 네 개 이상의 건반을 한 번에 누르면 ‘위잉 위잉’ 하는 소음까지 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더 멀리하게 됐다.


Chopin Nocturne Op. 9 No. 2



2005 - 2009

Schumann Humoresque, Op. 20


포기와 타협을 반복하며 피아노로부터 멀어지다 진로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음악 말고도 손으로 뭔가를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창조적인 작업과 옷을 좋아했다. 다양한 전공 중에 실기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예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의류학과에 진학했다. 

교양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대학 수업은 전부 찾아서 들었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피아노학원에 다시 다녔다. 내 배움은 초등학교 3학년에서 끝났는데 학원에서는 나이를 감안하여 입시곡 수준의 곡을 줬다. 혼자 연습한 시간이 길었기에 어느 정도 실력은 늘어 있었지만 중간 과정을 건너뛴 채로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2008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내가 연주한 쇼팽 에튀드 혁명이나 베토벤 소나타 비창 3악장 같은 것들을 하나씩 올려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내 소리가 좋다며 쪽지를 보내왔고 가까워졌다.

작곡을 전공하고 피아노과로 전공을 바꾸어 다시 학교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듣는 귀가 좋았던 그는 나에게 좋은 연주와 연주자들을 소개해줬고 단순했던 내 음악 세계의 차원이 확장됐다. 그가 진리로 여겼던 레가토는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음악의 시작이자 기준이 되었다. 

그 사람 덕에 몇몇 피아노 곡이 아닌 피아니스트를, 안드라스 쉬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라두 루푸와 글렌 굴드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손열음의 팬이 되었고 중학생 조성진의 연주회를 당시에는 큰 경쟁 없이도 찾아다니며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피아노 앞에서 건반을 두드리고 소리를 내어 좋은 멜로디를 따라 쳤다는 기쁨을 얻는 데 그쳤던 것이 좋은 소리를 듣고 구분하고 알고 시도하는 쪽으로 발전해 갔다. 


다니던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고 연습실에 다니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한 공부를 시도했다. 공부할 곡을 정하고 그의 지도에 따라 가장 느린 속도로 레가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학교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새로운 피아노 연습법이 어렵고 힘들어서 반사 효과도 있었겠지만 피아노 연습을 통해 노력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1학년 때 F 없이 학점 평균 2.2점이었던 나는 3학년 때 학과 전체 수석이 되었다.

의류학과 특성상 오랫동안 작업을 해야 할 일이 많아 연습할 시간을 내기 힘들었지만 꾸준히 했기에 실력이 조금씩 늘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에 대한 팬심은 나를 음악적으로 더 자라게 했다. 공연을 따라다니는 것도 모자라 그의 연주를 오래 듣고 싶어서 규모가 큰 피아노 협주곡들을 유튜브에서 다운 받아 TV로 연결해서 종일, 여러 날 반복해서 보고 들었다. 40~50분에 달하는 대곡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르고 어느 부분에 어떤 악기들이 나오는지 언제 기침소리가 들리는지까지 외우게 됐다.

음악에 가까워질수록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삶이 좋은 쪽으로 바뀌어 갔지만 정작 연주를 하는 것에는 부담이 생겼다. 좋은 소리를 알게 된 이상 계속해서 전처럼 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를 배웠지만 그 방법으로 음악을 만들려면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완전히 몰두해야 했다. 친구 학교 연습실을 사용하고 틈나는 대로 연주를 들으러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편입하고 싶다는 충동이 한 번씩 찾아왔지만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야지, 불확실한 일에 투자할 여력도 실패를 메울 자원도 마땅치 않아, 지금 내 꿈은 의상 디자이너야 하는 생각들이 밀어냈다. 그렇게 피아노는 쭉 2순위였다.


Schumann Humoresque, Op. 20



2010 – 2014

Chopin Scherzo No. 2, Op. 31


학교에서 인정받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소속이 없어지고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학교 추천으로 선배가 일하던 유명 해외 브랜드 바잉MD 인턴으로 들어갔는데 더 오래 일하면서 정직원 전환 인터뷰도 볼 수 있었던 기회를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며 걷어차고 나왔다. 이후 정성껏 준비한 포트폴리오로 지원한 국내 대형 패션회사에서는 어떠한 피드백도 받지 못했고, 다음 시즌 백화점 쇼윈도에서 내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옷을 봐야 했다. 

신입 디자이너를 여자 기성복 55 사이즈에 맞추어 뽑았던 여성복 회사들은 키가 작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디에라도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갔던 작은 아동복 회사에서는 실장의 횡포에 시달렸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씻고 다시 출근하는 일이 잦았고 아침이면 차라리 사고가 나 입원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다니다 결국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좋아했던 패션인데 졸업 일 년 만에 진저리가 났다. 매 시즌 해외 컬렉션을 재미있게 공부하고 꿈꾸던 사람이 온갖 관련 없는 회사, 하다못해 보험사에까지 이력서를 넣고 거절당하길 반복하며 많이 어두워졌다. 

공무원 학원까지 알아보다 아빠의 제안으로 보석 업계로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됐다. 도매 업체에서 일도 해보고 주얼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2년 과정을 마쳤지만 그쪽도 패션 업계와 마찬가지로 환경이 열악했다. 다시 온갖 회사를 향한 프러포즈를 시작했다. 디자이너/MD 근무 경력, 마케팅 과정 수료, 졸업 당시보다는 이력서에 쓸 게 한두 줄 늘긴 했다. 줄줄이 광탈의 고배를 마시면서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일까 할 때쯤 아웃도어 브랜드 런칭을 계획하고 있는 원단 회사가 구원해 줬다. 졸업 후 만 4년 만에 회사다운 회사의 정직원이 됐다. 원단 해외영업과 신규 브랜드 마케팅 직무였다. 

사수가 여기서 버티면 어딜 가든 잘할 거라 격려 섞인 겁을 줬다. 이미 최악을 겪었기에 웬만한 건 견딜 수 있는 맷집이 있었다. 아동복 회사에서는 고문관 취급을 받았었는데 여기선 일 잘한다는 말까지 듣고 2년 다녔다.


난리통에도 피아노는 계속 했다. 아동복 회사에 다니던 때나 돈이 아주 없던 때를 빼곤 학원에 다녔다. 사람에, 일에, 공부에, 먹고살 궁리에 치이며 감정을 표출할 길이 마땅치 않았던 내게 피아노는 탈출구였다. 악보를 읽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어 좋았다. 눈으로 음표를 따라 손가락 끝으로 건반을 누르고 피아노가 답하는 소리에 몰입해 있으면 혼자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고 깨어나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현실로부터 잠깐이나마 꺼내주는 피아노가 고마웠다.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아서였을까 주로 화려한 곡을 쳤다. 쇼팽 발라드 1번과 스케르초 2번 같은 곡들이었다. 취미생이 다섯 명은 되었던 학원에서는 연주회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치는 곡들 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쇼팽 스케르초 2번을 준비했다. 겉멋 든 천둥벌거숭이는 연주회라면 이 정도 규모의 곡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주 당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연주 한 번이 이렇게 떨리다니 전공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연주를 수줍고도 자랑스럽게 마쳤다.


대학 졸업 후 4년은 좋아하는 걸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보석과 주얼리는 꽤 재미있고 좋았다. 아름다움이 가치 평가의 기준인 것이 좋았고 전공과 관련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업계가 낙후되어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자연 속에서 엄청난 시간과 힘을 견뎌 만들어진 아름다운 보석이 신기하고 멋지지만 음악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에 함께 울고 전율하는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감동이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애매했다. 업계 특성상 한 번 몸 담으면 다른 가능성을 접어야 했기에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안 이상, 열악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옷을 포기했기에 보석을 포기하는 것은 더 쉽기도 했다.


Chopin Scherzo No. 2, Op. 31



2015-2018

Liszt Liebestraum No. 3, S. 541


원단 회사에 적응할 즈음 집이 이사하게 되어 피아노 학원도 옮겼다. 동네 음악 학원을 찾아보다 원장님 이름을 건 학원을 발견했고 아빠와 이름이 같아서 등록했다. 어디든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됐기에 제비 뽑기처럼 학원을 선택하곤 했는데 이번엔 운이 좋았다. 새로운 선생님은 악보 읽고 진도 나가는 것 이상을 가르쳐 주셨다. 베토벤 소나타 열정 1악장 레슨을 받을 때 멜로디 자체는 느린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잘게 쪼개진 여러 개의 세 박이 끊임없이 심장처럼 뛰고 있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인지하며 연주해야 한다 하셨다.

학원에는 입시생 몇 명이 있었고 입시 전 무대 경험을 위해 여는 연주회에 나를 포함한 취미생 둘이 합류했다. 나는 쇼팽 스케르초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무대에 올렸다.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역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했다. 나보다 손이 작은 어린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사례를 여럿 봤다. 손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어있는 중간 과정의 공부를 채우자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할 때는 곡의 규모에 욕심내지 말고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제대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원단 회사에서는 감사히 경력 2년을 채웠지만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었고 지금의 회사로 운 좋게 이직했다. 마케터를 구하는 공고였는데 나와는 동떨어진 IT회사였지만 직무 내용은 해본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가깝고 직원수가 많고 근속연수가 길어 믿음이 갔다. 

며칠에 걸쳐 실무진 면접과 시험을 보고 임원 면접에 갔다. 다른 임원들과 질의응답 중에도 날 보지 않는 분이 있었다. 이력서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고 계셔서 자꾸 시선이 갔는데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피아노를 치나?”였다. 대표이사였다. 무슨 곡을 치냐 하셔서 가장 최근까지 쇼팽 스케르초 2번을 쳤고 다른 작품도 여럿 공부하고 있다 말씀드렸다. 언제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겠냐는 영문 모를 질문에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했다.

최종합격해서 2016년 5월부터 다니게 됐다. 나중에 들었는데 대표이사께서 ‘피아노 친대서 뽑았다’고 하셨단다. 예술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당시에는 나름 열심히 일궈 온 경력보다 취미·특기 란에 관심을 가지신 것 같아 조금 섭섭했는데 어린 생각이었다. 피아노 덕에 귀인을 만난 거였다.


본인의 꿈이 학교를 만드는 거라 하시더니 300명 넘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인생 교육을 하셨다. 삶의 목적, 신뢰, 주도 같은 것을 주제로 과제와 워크숍을 했고 한 문장만 읽어도 나의 모자람을 통감할 수 있는 <한국 사상 산고> 같은 인문 도서를 읽고 동료들과 토론도 했다. 어려웠지만 평소에 두서없이 하던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강조하신 ‘삶의 목적’은 몇 년에 걸쳐 여러 차례의 과제로 진행됐는데 나는 어째 과제를 하면 할수록 회사를 벗어나는 삐딱선을 타게 됐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나의 행복은 음악과 가까웠다. 여러 번 접었던 꿈들이 생각났다. 지금까지의 삶은 피아노를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할 수 있는 나중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음악적 삶을 위해 음악과 멀어져 있어야 했다. 쫓기듯 사느라 음악을 2순위 밖으로 두고 살면서 ‘”피아노 치는’ 회사원”이라는 수식어를 가질 수 있음에 적당히 만족했다.

과제를 통해 뚜렷해진 삶의 목적은 지금까지의 순응을 모두 재고하게 했다. 아주 먼 나중에 대학도 가고 피아노 교습소를 차리겠다는, 오랜 타협으로 만들어 낸 꿈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 지금은 안되지? 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그 무렵 2018년 신년회가 다가왔고 회사에서는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빌려 무대를 만들어 주셨다. 감사를 표하는 연주를 하고 싶었다. 지루하지 않으면서 한 번쯤 들어봤을 곡, 멜로디가 아름답고 연주가 부담스럽지 않은 곡을 고민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Liebestraum을 연주했다. 그 외에도 영화 <라라랜드> OST와 1월에 생일인 직원들을 한 명씩 화면에 띄우면서 생일 축하 노래 반주를 했다.

긴장은 했지만 감정에는 큰 동요가 없었다. 예상과 달리 그날의 연주가 자아실현이라든지 생에 몇 번 없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아 놀랐다. 자연스러운 하나의 사건이었다. 무대가 있으면 나는 당연히 연주하는 거였고 그 일이 좋았고 무척 행복했다.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편입 준비를 시작했다.

음악을 공부하려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전공을 한다 해도 비교적 쉬운 길들이 있었다. 비전공자가 지원 가능한 학사편입 T/O는 대학원보다도 더 적었다.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학사편입을 선택한 건 논리적이지 않았다. 해묵은 결핍과 열망이 나를 눈 가린 경주마로 만들었다. 가고 싶었던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를 모두 나온 학생들이 가장 많은 곳, 그냥 그곳에 가고 싶었다.

생계 문제가 있으니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2년을 목표로 두고 일하고 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일상적으로 퇴근 후 매일 한두 시간씩 연습하고 있었지만 집에 가서 잘 준비하는 시간을 빼면 서너 시간까지는 늘릴 수 있었다.

악보를 미리 읽어 두었던 베토벤 소나타 13번을 입시곡으로 정했다. 자유곡 한 곡이 더 필요했다. 

나에겐 레가토 마스터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내 이야기에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맞는 곡을 몇 곡 줬다. 바흐 토카타 BWV. 912를 골랐다. 베토벤 소나타 13번과 함께 두 곡이 나에게 사명처럼 안겨졌다. 나이 서른에 돈키호테처럼 입시를 시작했다.


Liszt Liebestraum No. 3, S. 541



2018-2019

Bach Toccata in D major BWV.912


2018년, 2019년 2년 꼬박 단 두 곡의 연주를 준비했다.

퇴근하고 바로 집 근처 연습실로 가면 6시 30분부터 10시까지 연습할 수 있었지만 부족해서 회사 근처에도 연습실을 구했다. 점심 전용 비상 연습실이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서둘러 가 40분 정도 연습하고 돌아왔다. 점심 연습실에는 시몬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귀여운 시몬 덕에 외롭지 않아 감사했다. 전날 연습한 부분을 점심시간에 다시 연습해야 저녁에는 다음 부분을 새로 연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평일 하루 서너 시간, 주말 대여섯 시간 이상 연습했다. 

평일에 꼭 가야 하는 공연이나 강의가 있으면 회사에 오후 반차를 쓰고 연습을 하고 저녁에 시간을 냈다. 2년 동안 평일 저녁에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오랜 친구들을 끊어냈고 연습실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고립을 자처했다. 평일 저녁은 연습 시간이었고 연습실은 연습만 하는 곳이어야 했다.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누구에게도 사적인 감정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식구들에게도 목표를 알리지 않았다. 가끔 주변에서 내 일상을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올 때면 연주를 준비하고 있다고 대충 둘러댔다. 가끔 있는 팀 회식도 점심 회식으로 요청해서 참석했다. 이동 중에는 본받고 싶은 연주를 듣거나 전날 녹음한 연습을 듣고 개선점을 찾았다. 주말에는 내내 연습실에서 보냈다. 집, 회사, 연습실이 일상의 거의 전부였다. 시간을 쪼개어 쓰면서도 연습시간이 부족해 속상했다. 강박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음악을 만들기 위한 자연스러운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일을 병행했기에 바삐 움직여야 하긴 했지만 내 기준에는 억지스럽지도 압박적이지도 않았다. 

중간이 비어 있는 공부를 채워야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2년 간 두 곡을 준비하기에도 빠듯했다. 자료를 찾고 조언을 구하며 공부하는 곡 안에서 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어려운 건 길이가 긴 곡을 연주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들리도록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본이 박자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부분적으로 템포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더라도 내재되어 있는 안정적인 기본 박이 연주 전체에 하나의 완결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바흐 곡은 생활의 달인이 숙련된 감각으로 도구 없이도 정확한 길이로 물체를 잘라내고 정확한 깊이로 칼질을 하듯이 정확한 박에 정확한 소리를 내는 연주를 하고 싶었다. 메트로놈을 동반자 삼아 훈련을 시작했다. 다뤄본 곡이 많지 않아 테크닉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손 모양을 잡고 가장 느린 템포에 맞추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었다가 건반에 내려놓고 힘을 주어 누르는 것을 몸에 익히는 것에 중점을 뒀다. 이 연습을 메트로놈 속도 30에 맞추어 하루 서너 시간 동안 네 마디만 연습했다. 초견만 네 달 걸려 했다.

정상 템포로 약 12분 길이인 곡을 메트로놈 30에 맞추어 연주하면 한 시간이 걸린다. 이 연습을 50번 했더니 그 템포에서 완전히 곡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이때 메트로놈을 2~3씩 올려 증속하는 연습을 했다. 연습실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템포 32에도 34에도 같은 과정을 반복했고 서주-알레그로-아리오소-푸가1-아리오소-푸가2 전체 구조를 각각 원하는 속도인 170-100-60-110-100-150까지 내는 데 일 년 반이 걸렸다.


매 순간 고되고 외롭고 힘에 부쳤지만 아름답고 행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유롭게 노래하게 되었다. 모든 부분이 내 여러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토카타는 그렇게 내 노래가 되어 있었다.


Bach Toccata in D major BWV.912



2019-2020

Chopin Fantasie Op.49


베토벤 소나타 13번은 미리 해두었던 연습이 독이 되었다. 토카타에 정성을 들이다 보니 13번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언제라도 다시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당장 입시곡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무렵 피아니스트 예수아가 초등학생 때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 6번이 좋았다. 어린 여성이 용감하고 멋지게 성장해서 세상에 좋은 에너지를 퍼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은 내 손으로도 좋은 연주가 가능할 것 같았다. 대학에 진학하면 어차피 짧은 시간 동안 곡을 완성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서 시험을 다섯 달 앞두고 승부수를 뒀다. 내 연주 경력과 테크닉을 따져볼 때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곡을 바꾼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평생 할 음악이기에 모든 게 과정이다. 13번을 충분히 공부한 것도, 짧은 시간 동안 소나타 한 곡을 최대한 공부한 것도 좋았다.

원서를 접수했다. 여러 증명서를 인쇄하고 수험표에 사진을 붙였다. 내 이름과 얼굴 사이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이라는 글자가 있다. 음악학교에 지원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꿈은 이룬 셈이었다. 간직하고 싶어서 한 부 더 뽑았다. 지원 서류를 우편으로도 보낼 수 있었지만 시험 전에 동선도 볼 겸 학교에 방문했다. 학과 사무실에 제출하고 빈 연습실에 들어가 시험 곡을 쳐 보기도 하고 학생식당에 가서 점심도 먹었다.


실기를 며칠 앞둔 2019년 크리스마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 케이크를 사다 두고 부모님을 초대했다. 2년 동안 준비한 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들려주고 싶었다. 입시를 시작한 지 일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실은 그동안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늦은 고백을 하기까지 아무 말없이 기다려준 내 존재의 원형들.

작은 연주회를 마치고는 연습실과 집 회사 병원을 오가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갔다.


시험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부모님이 차로 데려다주셨다. 공 뽑기로 시험 순서가 정해졌고 1번을 뽑았다. 핫팩을 양손에 하나씩 들어도 좀처럼 손이 녹지를 않았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서 자꾸만 제자리 뛰기를 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낯익은 세 분의 피아니스트가 계셨다. 속으로 그분들의 성함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인사했다. 의자에 앉았는데 높이 조절이 익숙지 않아서 당황했다. 토카타부터 연주했다. 집중하지 못한 채로 두 곡의 연주를 마쳤다.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결국 해냈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면접을 위해 세 분 앞에 앉았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노란 조명까지 더해지니 천사들 같았다. 눈물이 목구멍까지 찼지만 참았다. 답변에 무리가 없는 질문을 건네셨는데 전부 바보같이 답했다. 마음에 없는 가벼운 말이 나왔다. 차라리 마음에 있는 한바탕 울음 쇼를 보여드리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 왔다. “피아노를 왜 좋아하세요?” 시험을 앞두고 A4용지 9장 가까이 써서 외우다시피 했던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에 있는 내용이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던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자리해 온 키워드 하나를 꺼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면접 대비 문서를 뒤지느라 바빴다. 몇 시간 같았던 잠깐이 지나고 딱 한 문장이 생각나서 답했다. 


면접장을 나오자마자 피아노가 내 몸을 사방에서 짓이기는 것 같았다. 그냥 피아노를 칠 때 행복하니까 피아노를 좋아하면서 왜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고 헛소리를 하고 나온 거야. 눈물이 쏟아졌다. 연주에 집중하지 못한 것보다 피아노를 왜 좋아하는지를 바로 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2년 동안 혼자 공부하면서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리포트로 준비해 외워 읽으려 했다니, 예술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 피아노과로 이직하고자 하는 회사원 같았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자리를 잡아왔지만 예술가들 앞에서는 애송이였다. 평생 음악에 헌신해 온 분들 앞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나타난 것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피아노를 사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지만 음악을 2순위로 두고 살아온 시간만큼 사회에 길들여진 회사원으로 자라왔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날 이후 전보다 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지냈고 이따금 툭툭 울었다. 시험을 본 날도 그다음 날도 고집스레 연습실에 가서 토카타를 쳤다. 내 토카타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피아노를 왜 좋아하는지 스스로 증명하는 길이었다.

와중에도 매일 회사에 나가고 다름없이 일했다. 무너지지 않도록 일상을 지탱해 주는 회사가 꼭 산길 양 옆으로 길게 이어진 밧줄처럼 고마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나름대로 예술적 고민을 많이 하고 내 한계를 알게 되기도 하면서 글도 많이 쓰고 분명 많이 발전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성숙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교류를 끊고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도 숨긴 채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간접적으로라도 다양한 삶과 관계를 접해서 결핍을 채워야 했다. 두세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화면을 보는 게 답답해서 영화 한 편도 마음을 먹고 봐야 하는 나에겐 약 처방 같은 것이었다. 한 달 동안 60편 정도 봤다. 다양한 상황 속 다양한 삶의 모습에 나를 대입시켜 보면서 스스로를 조금 더 정의할 수 있었다. 영화마다 짤막한 인상이 남았다. 각기 다른 시대와 장르와 배경의 영화들이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교훈이 있었다. 여러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중요한 것을 되새기는 훈련이었다.


입시 결과를 조회해 ‘불합격’ 글자를 확인했다. 모니터 옆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회사에서 우리사주를 취득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더 크게 웃었다. 

회사의 코스닥 상장으로 한동안 큰 이슈였던 일이다. 우리사주 취득은 회사를 최소 2년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합격을 확신했던 건 아니지만 우리사주를 산다는 건 내 희망을 저버리는 거였기에 안 될 일이었다.


1월 중순 즈음엔 ‘곧 크리스마스네’ 생각하다 놀랐다. 11월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시험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보낸 연말 두 달이 통째로 날아간 것 같았다. 겨울이 그제야 겨울로 느껴졌다.


Chopin Fantasie Op.49



2020

Brahms Intermezzo Op.118 No.2


빨리 새 곡을 정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에 엄마가 완곡하게 만류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네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내가 나를 몰아세우는 동안 엄마는 내내 마음 졸여왔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에 일부러 연습실 반대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먹고 싶었던 걸 먹으러 갔다. 오랜만에 머리를 다듬고 서점에도 갔다. 미뤄둔 책도 읽고 좋아하던 춤을 다시 추기 시작했다. 다시 공연을 보고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퇴근 후 회사 앞에서 연습실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도 어색하고 불안했던 나는 차츰 괜찮아졌다. 그 무렵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연습실 재등록을 망설이던 차에 회사에서 합창단을 만들어 나를 반주자로 임명했다. 사내 카페에 들일 피아노를 내가 직접 중고 피아노 매장에 가서 골랐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큰 창을 통해 서쪽 하늘이 보이는 사내 카페는 퇴근 후 내 아름다운 연습실이 되었다.

새 연습실에서 새로운 곡을 시작했고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새로운 삶도 시작됐다. 


여전히 대학교에 가고 싶지만 평생 피아노에 헌신한 사람들만큼 하겠다는 욕심에서는 자유로워졌다.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주기 시작했고 나에게 조금 너그러워졌다. 좋아하면서도 오랫동안 참아왔던 많은 걸 허락했다. 2년 간 묶여 있던 마음이 제멋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동료들과 친구들과 특별한 목적 없이 보내는 시간이 즐겁고 내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재미있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이 어이없이 반갑고 무용학원에서는 올해엔 꼭 다리 찢기를 성공하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너무나 치고 싶던 곡들, 베토벤 소나타 24번 1악장과 바흐 평균율 2권 23번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슈만 에튀드와 어린이 정경을, 슈베르트 방랑자 소나타 2악장을 마음껏 연습하고 있다. 


전염병 시국에서도 지난 2년보다 재미있게 지내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초여름 저녁이었고 연습실 커다란 창을 가득 채운 파란 하늘에 꼭 흰 파도 같은 구름이 있었다. 

브람스 인터메조 118의 2번을 연주하다 하늘에 뜬 파도와 여러 번 눈이 마주치던 순간, 

내가 연주보다 잘할 수 있는 음악적 흔적을 남겨 보기로 하고 프로젝트명을 지었다.

'음악이 쓰는 글'



Brahms Intermezzo Op.118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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