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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Feb 21. 2019

양자 요동이 만든 은하

상대론적 지평의 양자역학 (1)


일반 대중을 위한 소개 글에 아래처럼 구구절절 수식까지 쓴 이유는 일반 강연을 하면서 흔히 느끼는 한 가지 문제의식 때문입니다. 비전공자를 위한 소개라는 것이 당연히 말과 글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런 말과 글에 원래의 과학적 실체가 충분히 담겨 있다고 오해하는, 그래서 그 말들을 일상의 언어로서 깊이 이해하면 그 과학적 실체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더 심하게는 이를 언어와 논리로서 반박하려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의미가 있기에는 현대의 과학은 너무 많은 과정을 거쳐 축적된 결과물들입니다.


그렇다고, 수식이 조금 더해졌다고 이야기가 정확해졌느냐 하면 그 역시 전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말과 글 아래에 숨겨진 일부를 들춰 보임으로써, 일상의 언어가 전혀 충분할 리 없다는 느낌을 피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언어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공유된 경험이 그 암호를 푸는 열쇠이고요. 그리고 과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유된 경험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된 경험은 같을 리가 없으니, 이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의도입니다.


아래의 일상의 언어로서 가능한 만큼의 과학도 이미 충분히 신기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만족해도 되고, 만족스럽지 않으면 스스로 시간을 투자하여 한 단계씩 깊이를 찾아가도 좋습니다. 마치 프로 등반인들만 가던 히말라야가 이제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 관광코스처럼 되어가듯이.... 그러나, 그 말 자체를 탐구하려 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오랜 시간 닦아온 과학의 경험을, 임의로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셈이니까요.


제목의 그림은 지금 우주에 있는 은하들의 분포를 3차원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지구에서 보는 하늘의 일부 방향에 대하여, 회색 단면이 가장 가까운 곳, 그리고 그 반대쪽이 가장 먼곳입니다. 밝은 회색 혹은 초록색 점 하나하나가 은하에 해당하며, 중력이, 아래의 밀도 섭동에서 시작하여, 100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분포입니다. (출처: Baryon Oscillation Spectroscopic Survey (BOSS), SDSS-III)


이 시리즈는 KAOS재단의 초청으로 최근에 한 일반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물은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 글들에서 설명한 대로 상대론적 지평 즉 horizon의 일방통행 성질은 시공간을 "안쪽"과 "바깥쪽" 두 부분으로 나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서로 소통이 가능한 ”안쪽”과, 그런 “안쪽”에 등을 돌린 “바깥쪽”으로... “안쪽”은 무언가를 "바깥쪽"으로 내보낼 수 있으나, 그 반대 방향으로는 아무것도 못 들어온다는 게 지평의 정의이다. 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 이야기했던 우주의 지평은, 무한할지도 모르는 우주를, 그렇게 사실상 유한한 “안쪽”으로 제한한다. 그다음 글에서 이야기한, 블랙홀의 정의와도 같은 사건의 지평의 경우, 반대로 이런 의미에서의 “안쪽”이 오히려 블랙홀의 외부에 위치한다.


"바깥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으면, “안쪽”은 그 자체로 충분하므로 굳이 상대론적 지평 건너편을 이해하려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가끔 엉뚱한 곳에서 어물거리다가 "바깥쪽"으로 밀려 나가 버리는 것들이 있지만, "안쪽"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손실에 불과하다. 그렇게 나간 것들이 갑자기 다시 돌아오는 일이 절대 생기지 않는다면, 즉 그 지평 자체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는 한 일단 밖으로 나간 것들에 대한 문제는 물리학적으로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블랙홀 전쟁이라고 알려진, 1980년대 이론가들 사이의 논쟁은, 양자효과로 인해 블랙홀의 지평이 쪼그라드는 현상을 발견하며 시작된 논란이긴 한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지평 건너편, 즉 "바깥쪽""안쪽"에서 사용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무한히 먼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온갖 이해하기 힘든 20세기 물리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인과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특히 상대론은 그 인과의 효과가 빛보다 빠르지 않다는데 근원을 두고 있으니, 무한히 먼 미래가 어딘가에 있는 것들을 과히 걱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은 고전적으로 비교적 정확한 이야기이지만, 양자 역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양자 역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파동임을 이해하는데서 시작하는데, 파동의 경우 그 위치를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파동이 “안쪽”에만 있는지, “안쪽”과 “바깥쪽”에 걸쳐 있는지, 혹은 “바깥쪽”에만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깥쪽"이 무한히 먼 미래에 있다면 이런 골칫거리가 없을 것이나, 상대론적 지평에서의 그 무한히 먼 미래란, "안쪽"의 입장에서만 유효한 설명이라는데 문제의 소지가 남아있다. 특히 지평을 지나 "바깥쪽"으로 나가고 있는 존재에게는 지평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유한하므로 이들의 입장에서는 "바깥쪽"은 절대 무한히 먼 미래가 아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에서 하나의 파동을 관찰하면 어떤 차이가 나타날까?


지평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사람의 경우 사용할 시간을 S, 그리고 안전한 안쪽에 남아있는 사람의 시간을 t라고 하자. 그리고 S = S0에 앞사람이 지평을 통과했다고 해보자. 이 두 가지 다른 시간 사이에는, 어떤 길이 L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수식 관계가 성립한다:


c*(S-S0) = - A(S0) * L * e^{-c*t/L}


"안쪽" 입장에서의 시간인 t 가 무한히 커져야만, 지평을 통과하는 사람의 시간 S가 겨우 간신히 S0에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이야기 한, 지평의 “바깥쪽”이 “안쪽”의 입장에서는 무한히 먼 미래에 있다는 말의 실제 내용이 이것이다. 여기서 A(S0)는 S0의 어떤 함수인데, S0값은 지평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르지만 각자에게는 상수이니, A(S0) 역시 상수라고 생각해도 좋다. 일단, 무시하자.




여기서 잠깐 수학자들이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신기한 수식 하나를 배우고 넘어가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e^{i*x}  = cos(x) + i*sin(x)


이과 출신들에게는 Calculus 배울 때 초반에 나오는 식이고, e는 오일러의 수로 알려진 2.7182818284590452353602874713527.... 이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이 식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 함수를 미분하면 양쪽 다 원래함수에 i가 곱해진 결과가 되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과 출신에게는 오른쪽 삼각함수들과 허수 i 정도까지만 보일 것이다. i*i = -1이라고 하는... 사실, 필요하면 오른쪽을 왼쪽의 정의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양자 역학은 이 수식과 함께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파동이라는 것이 결국 삼각함수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양자 파동은 복소함수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특히 특정한 에너지를 가지는 경우


e^{-i*w*t}


라는 모양의 함수가 곱해져 있다. w는 그 입자의 에너지를 "플랑크 상수"로 나눈 양에 해당하는데, 에너지가 양이면 물론 w > 0 이어야 한다.




따라서, 지평의 "안쪽"에 쭉 살고 있는 사람이 정의하는 입자란 양자 함수가 다음과 같이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들을 말한다.


e^{-i*w*t}


w는 상대론적 에너지이므로 흔히 생각하는 운동에너지가 아닌 질량까지 포함한 에너지를 말하며 반드시 질량보다는 크고 따라서 0보다 크다. (이 이야기 곳곳에 광속 c와 플랑크 상수가 곱해져 있거나 나누어져 있는데, 작가가 알아서 잘했겠거니 믿고 대략 무시하자.) e^{ -i*w*t}와 같은 양자 입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는 이야기는


N*e^{-i*w*t}


처럼, 큰 (~N) 숫자가 곱해진 파동 함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여전히 w > 0 이면서


e^{i*w*t}


처럼 움직이는 파동 함수는 무엇을 나타낼까? 이들은 소위 반입자라고 알려져 있는 녀석들이다.


문제는 사건의 지평 안쪽으로 추락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는, 즉 S를 시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자와 반입자로 인식되는 파동 함수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각기 e^{-i*W*S}와 e^{i*W*S}라는 파동 함수들이 각기 입자와 반입자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데, t와 S의 관계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는 N*e^{-i*w*t}를 수많은 e^{-i*W*S}와 e^{i*W*S}들의 합으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공대생의 경우 학부 1학년 때 배우는 푸리에 변환이라는 이름으로 나름 잘 알려져 있다. 결론만 말하자면, N*e^{-i*w*t}를  e^{-i*W*S}들 만으로 재구성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e^{i*W*S}라는 파동 함수 역시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즉 t를 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w라는 특정한 에너지의 입자들만 많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일한 양자상태를 이번에는 S를 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온갖 에너지 W를 가진, 그리고 입자와 반입자가 뒤섞여 중첩된 그런 양자상태로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양자상태 자체는 어느 시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하지 않지만, 그 상태를 입자들의 모음으로 이해하려는 순간, t를 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람과 S를 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반대의 이야기도 성립하는데, 여기서 새로 생기는 문제는 t가 실수의 영역에 있을 때, S는 실수의 영역 절반, 즉 S < S0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즉 t가 아는 S는 가능한 S값의 절반뿐이라는 이야기인데, 물론 이는 지평이 시공간을 둘로 나누기 때문이다. 실은 위 두 가지 시간을 연결 지으려면 S > S0에 해당하는 또 다른 t와 같은 종류의 시간이 필요한데, 이를 t’이라고 부르자. S와 t’의 관계는


c*(S-S0) = A(S0) * L * e^{c*t’/L}


이며, t’은 지평의 "바깥쪽"에서 사용하는 시간에 해당한다. 지평은 S=S0에 해당하므로, 이곳은 t'이 음의 무한대인 곳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e^{-i*W*S}를 t와 t’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려면 e^{-i*w*t}와 e^{i*w*t} 그리고 e^{-i*w*t’}와 e^{i*w*t’}이 모두 필요해진다.




이런 두 가지 다른 시간 t와 t’ 그리고 S의 관점에서 사용하는 파동 사이의 상호 관계와,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양자 장론의 기본 원리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이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S를 시간으로 쓰는 사람들, 즉 상대론적 지평의 양쪽을 다 보기로 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라고 생각한 지평 부근의 양자 상태를, t를 시간으로 쓰는, 즉 지평의 "안쪽"에만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면, 전혀 진공과는 거리가 먼 그런 상태로 인지된다.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는 이유는, 입자라던가 에너지라던가 하는 개념 자체가 무엇을 시간으로 쓰느냐에 의해 다르게 정해지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입자의 뉴턴식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는데, 속도 자체가 시간에 대한 미분으로 정의되므로, 시간이 제멋대로인 상대론에서는 불변량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뉴턴 역학에서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므로 기껏해야 초를 단위로 쓰느냐, 분을 단위로 쓰느냐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상대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섞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여기에 "입자"의 정의에 필요한 양자장론이 들어오면 이 역시 시간의 모습에 따라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들어준다.


사실, 상대론은 사건의 지평이나 우주의 지평이 별나게 이상한 곳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 이곳을 지나는 우주인은 그저 그 부근에서 얼쩡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넘어간 것이지 사실은 본인이 지평을 넘어갔다는 것 자체를 전혀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지평 주변의 안팎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일 것이다. 이는 지평 부근의 양자상태가 S를 기준으로 진공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어있는" 양자상태를 각기 지평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시공간의 일부만을 보고 있는, 즉 t와 t’을 각기 시간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해석할 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위의 수식들에서 시작하여, 양자장론을 열심히 배워 쓰다 보면, 지평의 넓이가 L^2 정도일 때, t의 관찰자들은 지평이 마치 1/L에 비례하는 온도 T를 가진 표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우주의 지평은 체적 L^3 정도의 유한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진공이라고 생각했던 공간 자체가 1/L에 비례하는 어떤 온도 T로 가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온도라는 게 물리학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 중 하나인데, 학교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분자와 원자들이 빠르게 운동하고 있는 상태를 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 정도로 배운다. 그런데, 빈 공간의 온도라니 무슨 말일까? 실은 온도라는 것은 이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개념인데, 온도에 볼츠만 상수 k_B를 곱한 만큼의 에너지가 기준이 되어, 에너지 E의 입자가 있을 확률이 대략


e^{-E/(k_B*T)}


로 주어지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사실상 모든 종류의 입자가 에너지 k_B*T 전후의 에너지를 가지고 생겨나는 상태이다.




한편, 양자 역학은 모든 입자가 파동이라고 말한다. 온도에 대한 위의 마지막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따라서, 실제로는 거리 L에 있는 우주의 지평 "안쪽"은 대략 L 정도의 파장을 가지는 양자 요동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S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살고 있으면 진공이라고 생각했을 양자 상태가 t라는 시간의 입장에서는 전혀 진공이 아니고 우주의 지평 정도 길이의 파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 각기의 양자 요동은 우주의 팽창과 함께 그 파장이 커지는데, 이와 달리 우주의 지평은 일정한 크기 L로 남아 있으므로, 지평이 주는 온도에 의하여 파장 L의 양자 요동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우주의 지평 바깥으로 순차적으로 밀려 나간다. 이렇게 밀려나간 양자 요동은, 우주의 지평 크기보다 파장이 더 길어지면, 고착화되면서 고전적인 진동으로 변환되게 되는데, 따라서 초팽창의 시기가 지속되는 한, L보다 긴 모든 가능한 파장의 고전적인 진동이 유사한 진폭으로 온 우주를 뒤덮게 된다.


그런데, 초팽창이 끝나고 우주가 가속 팽창에서 감속 팽창으로 전환되면, 이번에는 우주의 지평이 커지기 시작하는데, 그 속도가 우주의 팽창보다 오히려 빠르게 된다. 이는 앞서 우주의 지평 밖으로 나갔던, 양자 요동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파장을 가진 고전적 모습으로 변환된 이 진동들이, 나갔던 역순으로  우주의 지평 안쪽으로 차곡차곡 돌아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각기의 진동은 초팽창 당시 우주의 지평 밖으로 먼저 빠져나간 시기에 따라 다 다른 파장을 가진 게 되는데, 늦게 나가고 일찍 들어온 것일수록 파장이 짧게 될 것이다.


초팽창 기간 중의 양자 요동에 기인하는, 그러나 이제는 고전적인 파동의 중첩은 초팽창 기간으로 인하여 완벽히 비워진, 따라서 어디나 동일한 모습이 되어버린 초기 우주를 곳곳에서 무작위적으로 그리고 미세하게 다르게 하는 효과를 내는데, 이를 초기 우주의 밀도 섭동이라고 한다. 이 미세한 차이는 시공간의 곡율의 차이로 구현되는데, 곡율이 곧 중력이며, 중력은 물질과 에너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밀도가 이곳저곳 조금씩 다르다는 말이다.


밀도 섭동이 만들어낸 우주 배경 복사 무늬. 밀도의 높고 낮음이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WMAP위성의 관측 결과이며, 21세기 우주론의 초석이다.

이전의 글에서 21세기 우주론은 거의 대부분은 우주 배경 복사를 정량적으로 관측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무늬, 즉 관측 방향에 따른 복사 온도의 차이 역시 이 밀도 섭동에 의한 것이다. 그 미세한 양자 현상을 137억 년 후에 천체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하고 있는 셈이다. 신기하다는 말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은하와 별을 만든 주 재료는 근원적으로는 초팽창 우주 말기에 재열화 과정에서 생겼음을 시리즈 첫 글에서 이미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물질들이 어떻게 왜 모여서 이런 밀도 높은 천체들을 만들게 되었고, 지금 보는 것과 같은 분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것이 밀도 섭동이다. 중력은 전형적인 빈익빈 부익부의 효과를 주는데, 조금이라도 밀도가 높은 곳으로 물질이 모이는 그 성질 때문에, 아주 미세했던 이 초기의 밀도섭동이 급격히 증폭되어 결국 천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흔히 양자 현상은 아주 작은 물체들에서 구현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양자 효과에 의하여 현재 우주에 있는 은하와 별의 분포가 정해졌다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아주 미세한 길이를 들여다보아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자 현상이 밀도 섭동을 만들어내었고, 이 밀도 섭동의 무늬가 현재 우리가 관측하고 있는 은하들을 만드는 씨앗이 되었고, 그 분포 역시 결정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경이로운 또 다른 이유는 이 밀도 섭동과 20세기 후반 블랙홀 전쟁을 촉발시킨, 즉 호킹을 유명하게 해 준 그 호킹 복사가 사실상 동일한 종류의 양자 현상이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 이어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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