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이군요. 이 브런치북 초반에 일반 상대성 이론 이야기를 하면서 배우기보다는 익숙해지시기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여기는 그렇게 말하는 것도 미안한 내용입니다. 앞글에서 이미 상대론적 지평이 있는 경우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시간을 생각할 수 있고, 동일한 양자상태가 이 두 가지 다른 시간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툭~~ 하고 무책임하게 던져 놓았습니다. 약간의, 어차피 도움되지 않았을 수식과 함께... 이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일 듯하여, 이 마지막 글에서 조금이나마 더 설명을 해보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설명"이라는 말은, 수식을 최소화한 그러나 원래의 물리학적 설명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득"과는 구별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생소한 현상들에 대한 일반 언어로서의 설명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거의 항상 "설득"에 귀결되는 것이 당연하고, 작가 역시 블랙홀 전쟁에 대한 이전의 시리즈에서 이런 "설득"을 시도했었습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이 글을 피해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굳이 따라가 보고 싶은 소수의 독자들이 있다면, 미리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설득"을 선호하는 독자들은 "상대론적 지평에 관하여"라는 지금의 시리즈를 쓴 원래 이유였던 KAOS강연을 시청하시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워낙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글을 먼저 쓴 후 선별하여 강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림과 동영상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 덕분에 소화하기 약간은 더 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강연 영상은 유투브에 있습니다.
(제목의 화보는 최근 Event Horizon Telescope라는 프로젝트에서, 지구 곳곳의 전파 망원경 신호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5천5백만 광년의 거리에 있는 초대형 블랙홀의 이미지입니다. 처음으로 사건의 지평을 직접 관측했다고 지난 며칠 소란스러웠던... 중간의 어두운 부분이 사건의 지평이라는데, 혹시 오해가 있을까 하여 덧붙이자면, 그 주변의 붉은 부분은 호킹 열복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물리현상에 의한 것입니다.)
일단 양자 역학을 너머 양자 장론이라는 말을 배워야 한다. 양자 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파동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보통 파동은 그 총량에 큰 제한이 없다. 많은 에너지를 넣으면 그만큼 많은 파동이 생겨나는 게 당연하다. 백열전구에서 나오는 빛을 생각해 보면, 필라멘트가 견뎌내는 한도에서는 많은 전류가 흐르면 흐를수록 밝게 빛난다. 그러나 전자 혹은 양성자의 양자역학은, 그 주어진 입자의 운동에너지는 늘어나도, 그 종류 혹은 개수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생각 하에 풀게 된다. 그러나 과연 자연은 그렇게 되어있을까?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이 하는 일이,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서로 변환되고, 그 과정에서 전자나 광자처럼 작은 질량의 입자가 추가로 생겨나는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E=Mc^2이라면 에너지가 충분히 투입되면, 즉 Mc^2 이상 더 투입될 때마다, M이라는 질량의 입자가 생겨나는 가능성이 있어야 할 텐데, 도무지 고전 역학이나 양자 역학의 어디에도 이런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역학이란 주어진 입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덩어리로 움직이는 게 고전 역학이라면, 파동처럼 움직이는 게 양자 역학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무언가 새로운 체계가 필요했다.
양자 장론은 이에 비해 입자 하나하나가 늘어가거나 줄어들거나 혹은 다른 입자로 바뀌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양자역학의 상대론적 확장인데, 그 방식을 이해하려면 언제나 그렇듯 빛과 광자를 예로 드는 게 좋겠다. 흔히 자연에서 접하는 빛은 “전자기장”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하게 수많은 광자들이 합쳐진 것인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빛 혹은 전자기장의 최소 단위가 광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광자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까지 이해하려면 광자가 아닌 전자기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양성자 하나를 최소 단위로 가지는, “전자기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양성자장”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양성자, 중성자, 전자 하나씩 둘씩 이야기하는 대신, 무수히 많은 양성자들이 생기고 없어지는 가능성까지 한꺼번에 기술할 수 있는 “양성자장”을, 마찬가지 이유로 “중성자장,” “전자장,” 등을 기본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양자장론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빛 혹은 광자를 기술할 “전자기장”도 함께 필요하겠다.
양자 물리의 이상한 부분은 물질도 사실은 파동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진짜 이상한 이유는 그 파동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흔히,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라는, 조금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장”의 최소 단위로 양자 입자가 생긴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광자는 말 그대로 빛의 알갱이다. 플랑크 상수에 주파수를 곱한 후 이를 원주율로 곱한 만큼의 작은 에너지를 가진 빛의 최소 단위이다. 광자 하나는 당연히 형광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빛이 아니라,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그런 것이다. 이를 형상화하는 말이 파동 무더기(wave packet)인데, 파동이 작은 크기의 공간 안에 제한되어 움직여 가는 모습을 지칭한다. 물론 이런 wave packet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모인 것이 흔히 거시적으로 보게 되는 빛이다.
양자 장론에서는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소립자들 역시 해당 "장"의 wave packet으로 만들어진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하나씩 던질 때마다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물결이 일어나듯이, wave packet은 투입하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많이 만들 수 있고, 이는 곧 그것이 전자이건 양성자이건, "장"이 소화할 수 있는 소립자의 개수에 제한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자역학적인 파동이 보통의 파동과 조금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입자와 반입자의 개념이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파동의 수준에서는 단순히, 앞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양의 w값에 대해 e^{- i w t}와 e^{i w t}로 각기 표현되는데, 역시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입자나 반입자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어떤 시간 좌표 t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상한 이유에서 t대신 -t를 사용해야 한다면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뒤바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시간 좌표를 조금 바꾼다고 물리현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이는 곧 개개의 입자들과 반입자들은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의 지평이 있는 시공간에서처럼 거시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의 개념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언가 물체 하나가 블랙홀로 추락하는 상황을 외부에서 보면 마치 추락이 점점 느려져서, 사건의 지평에서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추락하는 물체 자체는 순식간에 사건의 지평을 지나 블랙홀 안으로 떨어진다. 이는 흔히 쌍둥이 패러독스라는 말을 통해 잘 알려진 상대론적 시간의 이상한 행동의 특별한 경우인데, 사건의 지평 안팎을 다 고려하는 시간과 외부에서만 보는 시간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두 가지 시간을 각각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으로 절대로 해소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외부에서 보기에 무한히 먼 미래가, 전체 시공간의 입장에서는 유한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했듯 입자의 정의가 시간의 정의에 따라 달라진다는데, 이는 이 두 입장에서 본 “진공”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보는 “진공” 상태가 실제에 가까울까? 이에 대해 호킹은 안팎의 시공간을 모두 보는 시간을 기준으로 정의하는 “진공”이 옳다고 말한다. 즉 사건의 지평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의 진공이 옳은 선택이란 말이다. 이는 일반상대론의 기저에 있다는 "등가원리"(모 일본 만화에 나오는 그 등가원리가 아닙니다.) 즉 equivalence principle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한데, 사건의 지평이라는 장소가 이를 스쳐가는 입장에서 별나게 특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블랙홀 표면 즉 사건의 지평이라는 곳이 중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옳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시공간 전체를 볼 수 있는 물리학자가 주장하는, 아무런 입자도 없는 상태가 "진공"이라는 말이인데,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에게는 이런 "진공"이 전혀 다른 양자 상태로 보인다는 것에서 호킹의 이야기는 출발한다.
앞서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외부에서 사용하는 시간 t는 사건의 지평에서 그 수명을 다하므로, 사실은 내부에서 사용하는 유사한 성질의 그러나 또 다른 시간 t'을 같이 사용해야 하는데, 블랙홀 부근에서의 진공상태를 t와 t'이 정의하는 양자 입자들로 재해석해 보았더니, 내외부에 완전히 동일한 입자가 하나씩 공존하는 그런 양자 상태의 중첩이라는 것이 호킹의 발견이었다.
즉 외부에 있는 파동 e^{-i w t} 하나마다 사건의 지평 내부에 있는 파동 e^{-i w t'} 이 항상 엮여 있는데, 반경 R의 블랙홀 부근에 이런 양자 상태들이
e^{ -2*pi*w*R/c}
이 곱해진 모습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pi는 원주율이고 R은 블랙홀의 반경이며 c는 광속이다. 그런데, 사건의 지평 내부에 있는 파동 e^{-i w t'} , 혹은 이에 해당하는 입자는 미래로 가다 보면 블랙홀의 중심에 있는 소위 특이점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외부에 있는 입장에서는 절대로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진공"자체는 완벽한 양자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있는 양자 입자 e^{-i w t'}의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이 사실 때문에 실질적으로 외부에서는 어떤 양자 정보도 알아낼 수 없고 단순히 외부에 있는 e^{-i w t}에 해당하는 입자만을 확률 e^{ -4*pi*w*R/c}로 발견하게 된다. 한편, 확률 e^{ -4*pi*w*R/c}는 소위 볼쯔만 분포라고 하는 열역학에서 발견되는 확률 분포인데, 특히 이에 해당하는 "온도"가 블랙홀 반경 R에 반비례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의 의미하는 것은, 외부에서 보면, 플랑크 상수를 h라고 부르면 ”진공”이
T = h/(8*pi^2*R)
의 온도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열복사 상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호킹 열복사라는 현상의 물리학적 내용이다.
물리학자들이 이 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흔한 방법 중 하나는 "진공"이 알고 보면 온갖 종류의 입자와 반입자가 쌍생성과 쌍소멸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말을 통해서이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이렇게 생성된 입자들이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볼 수 없으나, 사건의 지평 부근에서는 그중 일부가 사건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면서 남겨진 반쪽이 호킹 열복사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잘 살펴보면, 위에 수식을 포함해서 한 이야기와 닮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올바른 설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다. 위에 말한 "설득"중 하나에 가깝다.
앞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주의 지평에 대하여 한 적이 있다. 이 현상 때문에 초기 우주 섭동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지평에서 발생하는 양자 역학적인 현상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블랙홀 사건의 지평과 우주의 지평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지평의 안팎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즉 사건의 지평의 경우, 지평 내부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지평의 경우 지평의 외부가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우주의 지평에서도 위와 같은 온도를 경험하게 되는데, 다만 내부의 크기는 유한하므로, 이 열복사는 블랙홀의 경우와 달리 어디로 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내부 전체를 일정한 온도로 데우는 역할을 한다. 비유를 하자면 창문도 없고 문도 없는 방이 하나 있는데, 방의 바닥뿐만 아니라 사면의 벽과 천장까지 온돌화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열평형 상태를 만들고, 우주의 지평 내부에 이에 해당하는 양자 요동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양자 요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근원이 양자역학적이라는 것이지 상태가 양자 역학적이라는 말은 아님을 유의하자.)
사실 블랙홀에서의 이 열복사 현상은 가속기 실험이 블랙홀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그 관측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상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블랙홀들의 위 온도는 우주 빈 공간에 있는 우주 배경 복사의 현재 온도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움직이니 이런 천문학적 블랙홀이 열복사로 질량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한편, 초기 우주 밀도 섭동은 이미 30년 전부터 관측이 시작되었고, 사실상 21세기 우주론의 초석이며, 우리가 우주에 대하여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량적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실험가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 현상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물리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위 두 상대론적 지평 사이의 양자역학적 공통점은, 전혀 다른 현상처럼 보이는 초기 우주 밀도 섭동을 관찰한 것을 통해 이미 블랙홀에서의 호킹의 계산이 옳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물리학은 현상마다 각각의 설명을 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작은 수의 원리들을 추구하는 게 물리학이다. 실험적 검증에 대한 조바심을 피해야 함을 이야기 해 주는 좋은 예이다. 일반 상대론의 직접적인 검증이 백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오기 시작하는 현재 상황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블랙홀에서의 열복사 현상을 호킹이 알아냈다면, 초기 우주에서의 이 현상을 처음으로 이해하고 사용한 사람은 Mukhanov라는 러시아 출신의 인물이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대 우주론에서의 그의 이 업적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특히 우주 관측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과연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가 이 분야에 난무하는 이론과 이론가들 사이의 유명하고 복잡한 역학관계를 무시하고 그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매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