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스윽- 하고 흘려 보면 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강도와 온도, 종류가 조금씩 다른 감정들.
잔뜩 채도 빠진 무지개 같이 여러 색의 흐릿흐릿한 상념의 구름들이 나를 감싸며 여행 후유증 이상의 깊은 허무함과 허전함으로 날 안는다.
돌아오는 17시간의 비행 동안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갔다. 견고하게 쌓였지만 모양이 맘에 안 드는 공든 탑을 부수고 다시 쌓을까를 고민하듯 내 미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하고, 한동안 외면하려 했던 혹은 외면당해야 했던 '나와 내 가족의 아픔'이 짙어지기도 했다.
머릿속 가득 상당히 생소한 생각들을 생산해내기도 했는데,
가령- 결혼의 '필요'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내가!)
가령- 내 삶을 이끄는 내 자세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물론' 케잌처럼 반듯하게 쪼개져 정량 배분할 수는 없지만, 그건 지극히 상대적인 것으로 칼자루를 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근접하게 그리고 상당히 공평하게 나누어질 수도 있다 믿는다.
하지만 역시, 늘 객관적으로는 바라봐지지 않는 것 또한 사람의 일, 그리고 감정의 것. 돌고 돌아 '내 일'이 되었을 땐 더욱.
현실과 이상이 뒤섞인 나의 미래를 어떻게 쪼개서 각각의 조각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둘 지를 다시 한번 정리할 시기란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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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냉정한 머리로도 충분히 잠재우지 못한 아직 식지 않은 피의 온도가 느껴지고 내일은 오늘보다는 적은 기회가 남아있겠지만 언제든 크게 움직일 수 있다 믿는 건 아마도 이미 한번 저질러 봤기 때문일 테다.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니야...' 생각하며 수년이 지났지만 , 먹어본 놈이 맛을 알지. 한 번 한 놈이 두 번은 못 하겠어.
당장은 그냥 또 그렇게 지내게 되더라도 그리고 또 결국 혼란이 찾아오더라도 살아있다고 생각하자.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날짜를 잊고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생각하며 며칠이 흘렀다. 나는 다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심신이 지쳐가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당분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접어 두고 '해야 하는 일들'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 속에 있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 물론 언제든 발 벗고 마중 나갈 마음의 자세를 준비해 놓았다.
내딛지 못한 아쉬운 발걸음들은 곧 내게 용단의 결정을 재촉하리라 믿으며, 아직 꺼내지 못한 수 백장의 사진과 이야기들은 그 순간에 닿을 때까지 틈틈이 꺼내어지며 나를 달랠 것이다.
- 2017. 09. 03
- 여행을 멈추지 않았기에,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