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가
한국 사람만의 종특인지(아니면 인간의 본능인지는 모르겠다만) 한국 사람들은 스포츠를 배움에 있어서 장비빨을 굉장히 많이 탄다.
한때 크로스핏에 한창 진심일 당시 장비 마련에 열을 올렸었다. 크로스핏터들의 국민 신발 나이키 메트콘을 필두로, 리프팅 벨트, 스트랩, 줄넘기, 가방, 운동복, 무릎보호대 등등 날이 갈수록 장비 욕심이 커졌다. 그에 비해 수영을 배우고 있는 요즘은 장비욕심을 의식해서인지 거의 사지 않았다. 수영을 처음 배우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수영복 한 벌, 수영모 1 개, 수경 1개의 단벌신사로 버텨왔다. 화요일에 수영을 하면 하루 말리고 목요일에 다시 써 주말 동안 세탁을 하는 식이었다(이런 나의 행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몇몇 이들도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중급반 두 달 차, 그날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물장구를 치던 날이었다. 끝날 때쯤 강사 쌤께서 오리발을 챙겨 오라는 공지는 나의 잠자코 있던 장비 욕심을 표면으로 꺼내올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래 지금까지 수영복 한 벌로 잘 버텨왔잖아? 이제 하나 더 마련할 때도 됐어. 오리발은 좋은 거 써야 앞으로 쭉쭉 잘 나갈 거 아니야. 오리발 끼고도 속도를 못 내면 뒷사람한테 민폐가 될게 뻔하잖아. 이왕 사는 거 잘 나가고 좋은 걸로 사자'는 소비 요정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수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유튜브에 나와 있는 웬만한 오리발 리뷰 영상들은 다 뒤져보고, 수영을 배우고 있는 지인에게도 물어보며 나에게 맞는 좋은 오리발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엄선된 나의 인생 첫 오리발. 바로 DMC사의 '엘리트 맥스 숏핀'이다. 가격은 10,9000원으로 내가 알아본 모델 중에는 꽤 고가의 상품이었다. 3만 원이면 오리발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욕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제품은 후기도 좋고 수요도 많은지 남은 색상이 별로 없었다. 구매 전 오리발은 좀 더 과감한 색상(형광색)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이미 품절이라 없었고, 남아 있는 색상은 너무나도 평범한 검정색 하나뿐이었다. 다른 색상을 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사실 아직 내 레벨에선 여전히 검정이 딱 맞는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냥 검정이더라도 나름 빨간색 포인트가 들어가 있고 멋들어졌다.
수영 장비에 투자를 한 번 하게 되자, 나의 욕심은 다른 상품들로도 눈길을 돌렸다.
수영복도 바꿀 때가 되었는데... 수영모 저거 색깔 이쁘다. 나도 더 이상 검은색만 고집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언제까지 수경에 습기 차서 반바퀴 다녀올 때마다 물로 담가서 씻어낼 거야...
나는 오랜만에 분비되는 소비 호르몬에 절여지며 가나스윔 앱을 끊임없이 스크롤했다. 결국 습기 차는 수경을 계속 쓰고 운동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 수경을 하나 추가 구매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나름 싸게 욕심을 잠재운 거 같단 생각이 든다.
아무튼 드디어 중급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리발을 내 발에 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어떤 오리발을 찾냐 보다는 나도 오리발을 찰 정도의 레벨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드디어 오리발을 찼다. 첫 발길질 전, 설렘과 긴장이 뒤섞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멋지게 벽을 차고 밀고 나가려 했으나, 오리발을 차고 도움닫기를 하는데 맨발로 할 때랑 느낌이 달랐다. 제대로 지탱해서 밀어주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안 미느니만 못한 정도의 거리만 나가서 발차기를 시작했다.
물속에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속도에 당황했다. 스키장에서 중급자 코스에만 머물다 갑자기 상급자 코스로 넘어왔을 때의 속도 차이랄까. 체감상 약 1.7배 빨라지니 나의 팔 돌리기도 덩달아 타이밍이 조급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오리발을 차면 체력 소모 없이 쭉쭉 잘 나갈 줄만 알았는데, 첫 오리발 수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체력 소모가 심했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단 걸 알았지만, 역시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차다 보니 점차 오리발 속도에 익숙해지고, 오리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접영 발차기를 하면서 비로소 즐길 수 있었다. 양발을 붙이고 돌고래처럼 위아래로 파닥이니 맨발로 할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내가 인어가 되어 진짜 지느러미가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강사 쌤께서 '접영 발차기에 평영 팔'을 하라고 오더를 주셨는데, 평영 팔은 아직 배워본 적이 없었다. 강사 쌤이 옆레인에서 저번달의 나처럼 이번에 중급반에 새로 오신 분들께 평영을 가르쳐주시느라 꼼꼼히 봐주실 수 없으셔서 아마 깜빡하셨던 거 같다. 안 배운 평영 팔을 하라는 오더에 나와 함께 배운 동기 회원 3분 정도가 똑같이 약간 얼타긴 했지만, 대충 옆사람들 보면서 휘저어 보았다.
오리발을 찬 덕에 팔 동작이 조금 엉성해도 앞으로 쭉쭉 나가서 속도는 맞출 수 있었다. 강습이 끝날 때쯤 되자 오리발의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를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당분간 우리 반은 화, 목 둘 다 오리발 착용 수업을 할 것이라는 강사쌤의 공지가 나를 설레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튜브로 평영 팔 동작 방법을 반복 재생하며 왔다. 오리발을 차고 수영하는 맛을 알아버리니 수영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훨씬 커졌다. 역시 스포츠는(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겐) 장비빨이 바쳐줘야 더 오래 애정을 갖고 할 수 있는 거 같다. 대신 한 번에 사면 효과가 짧은 수 있으니 길게 보고 야금야금 모아가봐야겠다. 실력이 뒷받침되고 당당히 형광 빤스를 선뜻 구매할 수 있는 그날까지... 킵 스위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