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핼리 Halley Dec 31. 2023

겨드랑이를 밀어야 할까요?

미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수영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수영을 하지 않고 살아가면 특히 남자들은 살면서 겨드랑이를 남에게 보여줄 일이 별로 많지가 않다. 몸짱(혹은 몸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헬스장에서 최대한 얇은 나시티를 입어 근육의 움직임을 보기 위해(근육 자랑을 위해서든)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겨드랑이 관리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의 겨드랑이는 한평생을 어둠 속에서 지내다, 최근 빛을 받고 있다. 팔 돌리기를 할 때마다 수영장 천장에 달린 화려한 조명이 나의 겨드랑이를 감싸며 물을 가로지른다. 강사쌤이 서서 유선형 자세를 잡아보라고 시키는 날이면 나의 부끄러운 겨드랑이가 모든 회원님들께 한 올의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완전히 오픈되어 버린다. 물론 서로의 겨드랑이에 별 관심은 가지지 않은 채 팔을 열심히 귀 뒤에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혹여나 나의 겨드랑이가 회원님들의 시각적 기억에 불쾌감을 심어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맞다. 나는 눈치 보는 걸로는 세계 1등인 토종 한국인이다).


지금까지 3명의 남자 선생님(+가끔 땜빵 오시는 선생님들까지 하면 더 많은 데이터가)들 모두가 겨드랑이를 깨끗하게 제모를 하셨다. 강사쌤들은 시범을 보일 일도 많아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클린 하게 유지하시는 거 같다. 시력도 별로 좋지 않고, 애써 신경 써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보이게 된(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갈 수 없다) 몇몇 남자 회원분들 몇몇도 겨드랑이를 깨끗하게 미셨던 걸로 기억한다.




우선 나는 '민다 만다'의 인생의 큰 결단을 내리기 전 각 선택지를 택했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상상해 보았다. 


만약 '민다'라고 결심을 한다면 '정도'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 숱 치는 정도로 밀어낼지, 아니면 완전히 클겨를 만들지. 수영장 강사쌤은 대부분 클겨(클린한 겨드랑이)를 유지한다. 이왕 한다면 나도 클겨로 간다.


다음은 '어떻게?'에 대한 질문이 따라온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턱수염을 밀 때처럼 전동 면도기는 안 될 거 같다. 한 번도 밀어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건 아니란 걸 안다. 그럼 어떻게 밀어야 할까? 


네이버 검색을 해보았다.


첫 번째 방법은 가장 클래식하게, 면도 크림을 바르고 쓱쓱 밀어내는 것이다. 가장 간편하고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의 단점은 털의 겉면을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에 새털이 자라날 때 내 삼두에 붙어있는 살을 찌르며 따갑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가 섞인다.


두 번째 방법은 제모 크림을 통해 녹여내는 것인데, 가장 깔끔한 방법 같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화학약품을 내 겨드랑이에 바르는 게 썩 내키지가 않는다.


마지막은 레이저 제모이다. 가격도 3~4만 원 대로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겨드랑이를 들고 잠깐의 수치스러움만 참으면 내 겨드랑이는 깨끗해진다. 물론 이 방법의 단점도 있다. 레이저로 태우면 앞으로 영영 평생 나의 겨드랑이털과는 생이별을 해야 된다. 아무리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겨털이라고 하더라도... 유교 사상에 길들여져 살아온 나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고 부모님께 받은 털을 아예 깡그리 태워버리는 게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이럴 때만 유교 보이다). 이들도 다 쓰임이 있기에 나는 것일 텐데,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미용의 목적을 위해 깡그리 태워버리는 게 왠지 잔인하게 느껴진다.(사실 병원 가기 귀차니즘이 돌아 맡 같지도 않은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지금 겨털을 미느냐 마느냐가 아직까지 나에게 큰 고민거리는 아니기에 당장의 우선순위에서는 밀려나있겠지만, 수영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레이저로 다 태워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나의 털들에게 생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깊은 관계를 맺어오진 않았지만... 2차 성징 이후 너와 보내온 짧지 않은 시절이 가끔 생각날 거 같다. 가장 어둡고 쿰쿰한 곳에서 묵묵히 본인의 역할을 해온 털들아... 너희들의 노고를 평생 잊지 않을게. 그동안 나의 겨드랑이를 보호해 줘서 고마워.'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겨드랑이 털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모른 채 오늘도 씩씩하게 뻗어가고 있다.

이전 06화 오리발 드디어 내 발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