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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Mar 26. 2022

시간이 지나서 보면 왜 그 지적이 맞을까?

글쓰기 모임 하는 법 06

[글쓰기 모임 하는 법]

06. 합평이란 무엇인가 



보도국 사회부 기자 시절 사무실이 13층이었습니다. 평기자가 쓴 기사는 여러 단계의 확인 절차를 거치는데 이 일을 하는 차장이나 부장을 언론계에서는 '데스크'라고 부릅니다. 데스크는 후배에게 팩트 체크를 다시 지시하기도 하고, 마감 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도 기사 방향을 뒤엎기도 합니다. 어떨 땐 막상 기사를 읽어보니 보도 가치가 떨어진다며 ‘삭제’ 하기도 합니다. 기자들은 취재 자체보다 오히려 이 단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뉴스 리포트의 경우, 그렇게 데스크가 고쳐놓은 기사를 종이로 출력해 녹음실이 있는 11층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2층 아래 계단으로요. 그 두 개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저앉아 통곡한 적이 많습니다. 내 문장이 고쳐지거나 삭제된 게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제가 끈질기게 주장했던 게 꼭 맞는 건 아니었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되더라고요. 반드시 싸워야 할 때, 아니면 내가 인정해야 할 때, 능력 부족을 반성해야 할 때, 그 모든 순간들을 그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면서 배웠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책을 쓸 때는 저와 2인 3각 하듯 목표를 향해가는 편집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글을 그렇게 출판 계약부터 맺고 쓸 수는 없죠. 쓴소리를 해도 괜찮고,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에게 가장 먼저 그 글을 보여줍니다. 저는 주로 배우자인 Choi에게 보이는데요, 어떤 때는 '정말' 가차 없이 빨간 볼펜으로 A4의 절반을 네모 테두리로 가둔 다음 '정말정말' 크게 대문자 엑스(X)를 긋습니다.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돼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들키기 싫어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푹 숙일 때도 있습니다.       


합평의 사전 정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으며 비평한다, 입니다. 모두가 보이도록 둥글게 앉아 서로의 글을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시면 됩니다. 영화에서 알코올중독치료자모임 같은 구도, 많이 보셨죠? 차이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일주일 동안 써온 글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일곱 명이 합평에 참여한다고 하면 한 글당 합평하는 시간이 20분이 넘지 않는 게 경험상 좋습니다. 너무 금방 넘어가는 것도 쓴 사람 입장에서 서운하고 도움이 안 되겠지만, 반대로 너무 한 문장 문장씩 파고들어 가다 보면 결국 글 쓴 당사자의 마음까지 너덜너덜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은 늘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배우 류준열이 지금보다 덜 알려졌을 때 주연으로 찍은 〈소셜포비아〉란 영화가 있습니다. 인터넷 뉴스에 악플을 단 젊은 여자가 실시간 이슈에 오르고, 인기 BJ들이 ‘현피 원정대’ 생중계를 하겠다며 그 여자 집에 찾아갔더니 이미 숨진 채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들은 이 숨진 여자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녀가 문예창작과 합평 시간에 있던 일화가 나옵니다. 친구는 그녀에 대해 타인의 작품은 신랄할 정도로 비판하면서도 자기 글이 비판받는 건 견디지 못했다고 기억합니다. 합평은 그만큼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나 자신을 평가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합평의 가장 큰 목적은 글의 점수나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닙니다. 글이 ‘잘 전달됐는가’입니다.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소설가 박상영은 "합평의 과정이 상담과 비슷했다"라고 인터뷰에서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내 생각을 읽는 것이 상담이고, 합평 역시 내 글이 다른 사람에 어떻게 읽히는지를 통해서 내 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죠. 

생각해보면 인터넷에 개인적으로 올리는 글 말고 공적인 글쓰기에서는 모두 그렇게 ‘잘 전달됐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칩니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도 일종의 글입니다. 그 글이 바로 확정되지 않고 최소한 한 단계의 과정,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는 과정을 거칩니다. 서로 소통 오류가 없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글은 최악의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고치기 힘듭니다. 1인 2역은 힘들죠. 그래서 객관적으로 읽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김훈 작가의 에세이를 담당한 출판사 편집자는 육필 원고 여백에 이런저런 연유로 이 문장이 없으면 더 잘 읽힐 것 같다고 메모해 놓는다고 해요. 그러면 김훈 작가는 처음에 ‘절대 안 된다’고 쓰지만 다시 지우고는 “빼라 빼!!”라고 쓰신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도 편집자와 작가의 갈등은 유명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스티븐 킹이 쓴 유명한 작법서 《유혹하는 글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편집자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이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타락한 작가들은 한결같이 편집자의 완벽한 솜씨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글을 쓴 사람은 잘 모릅니다. 안 보여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 지적이 맞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 경험담을 털어놔 볼까요. 저는 회사 초년기 상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상사에게 평소엔 담지 않는 욕을 했습니다. 후폭풍은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죠. 십 년이 지나서 그 일을 썼고, 나중에 제가 쓴 에세이에 그 글이 포함됐습니다. 그런데 SNS에서 제 책 소개가 되고 나서, 제가 썼던 그 단어가 성차별적이란 지적이 나왔습니다. 편집자도, 저도 예상치 못한 지적이었습니다. 편집자는 2쇄를 찍을 때 그 말을 순화하거나 아예 빼자고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악플을 받은 게 울컥했습니다. 책의 맥락을 읽어보면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고, 결국 제가 우겨서 그 문장을 바꾸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났는데요, 지금 생각은 또 다릅니다. 한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는 것은 그 단어의 생명력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 일이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글로 남긴다는 것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나저나, 그 빨간펜 엑스자를 친 Choi와는 그날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요? 빨간펜 대신에 파란색 펜을 쥐어주고, 다시 한번 봐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랬더니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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