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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영 Oct 03. 2023

12. 대공허(2)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마야의 원론적인 물음에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야카는 마야를 빤히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어떤 운명들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단다. 내가 굳이 보려하지 않아도 보이는 미래가 있다는 얘기야. 그런데, 아가. 실은 네 운명도 그랬단다.”


“제 운명이요?”


“그래. 나는 네가 그 별을 구하려고 할 줄 몰랐어. 내가 본 미래에서 너는 나를 떠난 그 날, 이데아에게 네 별의 운명을 보고했거든.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그것부터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나는 너의 그 행동이 네 별을 그의 잔혹한 운명에 올려놓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단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그런데 운명을 거스른 자는 네가 처음이란다.”


야카를 쫓아가던 마야가 발걸음을 멈췄다.


“제가 운명을 거슬렀다고요?”


마야는 약간 충격에 빠져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야카는 분명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진리같은 것이라고 마야는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보잘것 없는 워커출신의 어린 거신인 자신이, 거대한 운명을 거슬렀다니…….


“솔직히 나도 놀랐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지금은 네 운명을 읽어보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다는 거야. 아무것도 말이지. 내가 모든 운명을 읽어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단편적인 운명은 읽을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네 운명은 조금도 읽히지가 않아.”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야의 얼굴에 불안이 비치기 시작했다. 야카는 서둘러 마야를 달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그렇다고 해서 네게 무슨 문제가 생겼거나 앞으로 생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거든. 여기서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두가지 뿐이란다. 하나는 네 별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쩌면 네가 네 별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베베의 운명을요?”


“그래. 그래서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거란다.”


“베베가 위험한 존재가 되지 않게 막으시려고요?”


“하하, 꼭 그런 이유때문만은 아니야.”


야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마야도 따라 갔다. 야카는 벽장으로 보이는 공간을 뒤적이며 작은 옷가지들을 꺼내더니 마야의 몸에 대어 보기 시작했다.


“그럼 다른 이유도 있나요?”


“맞아.”


“그게 뭔데요?”


“자, 대답을 듣기 전에……. 우선 이 옷 좀 입어 보겠니?”


야카가 내민 옷은 야카의 옷과 비슷한 스타일의 도포였다. 마야는 그 옷이 야카의 요람에서 입던 옷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국적인 옷은 다행히도 마야에게 딱 맞았고, 그 모습을 보며 야카는 미소를 지었다.


“잘 맞는구나. 아주 좋아. 네가 앞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그 옷을 입는 게 좋을 거야. 원래 옷은 누가 봐도 빛의 요람에서 만들어낸 옷 같으니 말이다. 그건 너무 눈에 띌거야. 나는 종종 로스트들에게 내가 가진 옷들을 주거든. 그러니 네가 그 옷을 입으면 그들 사이에 섞이기 좋을 거다. 이 모자도 써보렴.”


“이렇게요?”


“옳지. 자, 이제 머리칼이나 눈동자도 어느정도 가려질테니 여행하는데엔 문제가 없을 거야.”


야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 아까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겠지?”


야카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았고, 또 아주 많은 운명들을 보았단다. 그 운명들이 착실히 실행되는 것도 보았지. 어떤이는 운명을 알고도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다 다른 이들을 죽이기도 했어. 그러나 그런 끔찍한 짓을 벌여도 운명은 바뀌지 않았단다. 한 거신은 다른 거신 때문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듣고 그를 죽였지만, 죽은 거신의 친구가 복수하는 바람에 결국 죽고 말았지.”


“운명이 이루어졌네요.”


마야카 중얼거리듯 답했다.


“맞아. 그리고 나는 업겁의 시간동안 그 모든 것을 보았지. 그건 정말 무기력한 일이야. 다른 거신들은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나를 부러워하고, 필요로했지만, 당사자인 나는 아니었단다. 내게 이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어. 나를 운명의 고리에 영원히 가두어 버린 저주 말이다. 그런데 네가 처음으로 그 고리를 깨버린거야.”


“제가요?”


“그래. 물론 절반은 네 별의 영향때문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내 생각에는 오로지 너의 힘때문 같구나.”


야카가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요? 전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마야가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야카는 마야의 이마를 쓸어주며 진정시키고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거신들과 너의 차이는 딱 하나뿐이란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쳤던 다른 거신들과 달리 너는 다른 이를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거지. 네 별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 때문에 제 운명이 바뀐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과를 보렴. 네 별을 구하려는 네 마음이 정말로 네 운명을 바꾸었는지, 그 증거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너를 도와주고 있잖니. 만약 네가 운명대로 저 별을 이데아에게 데려갔다면 나는 또다시 무력함에 가라앉아버렸겠지. 널 돕는 일도 없을 테고.”


야카의 대답을 마야는 곰곰히 곱씹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 세월동안 나는 모든 악의와 모든 절망과 모든 죽음을 보아왔단다. 그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들도 물론 보았지만, 때로는 선의와 희망과 삶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 모든 게 정해진 길 위를 걷는 기분이었거든. 내 고향을 잃었을 때에도 그랬지.”


“혹시…….”


마야가 머뭇거렸다. 야카는 조용히 마야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혹시 야카께서도 운명을 바꾸려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야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에, 그랬던 적이 있어. 고향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고,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단다. 어떤 별도 영원할 수 없듯이.”


야카는 다시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둥근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마야."


"네?"


"아직도 멸망이 뭔지 모르겠니?"


야카의 질문에 마야는 대답하지 못했다. 멸망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건 마야도 이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 할 수는 없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거야. 끝난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지?"


"네."


"고향이 사라졌다는 건, 고향이 멸망했다는 이야기란다. 그러니 우주가 멸망한다는 건 우주가 사라진다는 뜻이지."


마야가 두 눈을 깜빡였다. 이보다 명확한 설명은 없을 거란 걸 마야도 잘 알았지만, 이상하게 마야 내면의 어떤 것이 그 이상의 이해를 맊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이나 끝은 상상할 수 있었지만, 멸망에 대해 상상해 보려고 하면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뿌옇게 변했다.


"넌 빛의 요람 출신이잖니. 그동안 너는 멸망을 이해 할 필요가 없었을 게다. 이데아가 그렇게 요람을 설계했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모르겠어요."


"네가 알아야 하는 건 이제부터라도 네가 멸망에 대해 알아가야 한다는 거야. 네가 이데아에게서 완전히 분리 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마야는 우주 너머로 떠난 워커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고향을 떠났어도 고향의 일부일 수 있는 까닭은 모든 워커는 마망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마망과 워커는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결코 분리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멸망은 네 별의 운명이잖니."


야카가 나지막히 말했다. 마야는 자신의 분리 될 수 없는 다른 연결 점을 떠올렸다. 베베. 자신의 별.


“네가 네 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야. 모든 선의와 모든 희망, 모든 삶……. 내가 이것들을 무력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것들이 운명을 바꾸는데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러니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진짜 문제는 '나'란다. 어떤 운명앞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전능하지 않거든. 너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이 우주에게 있어 모든 거신은, 그러니까 마망까지도 한낱 미물에 불과하니까. 나는 다만 내게 버거운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다. 운명을 바꿀 수 없는데, 또 바꿀 수 없다고 믿는데, 그 운명 안에 갇혀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가, 네 존재가 내게는 위로가 되어 준단다. 나는 네 별이 우주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고 널 돕는 게 아니라, 네가 내 위로이기 때문에 널 돕는 거지.”


마야는 야카를 올려다보며 이 거대하고 오래된 존재가 가진 슬픔을 살펴 보았다. 슬픔의 형태는 마야가 느껴본 것과는 달랐지만, 마야는 그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거신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자, 네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줄 게 있단다.”


다음 날, 떠나려는 마야와 베베를 불러 세운 야카는 서랍을 하나 열어 그 안에서 작은 크리스탈 세 개가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크리스탈은 모두 투명했지만, 저마다 희미하게 다른 빛깔을 품고 있었다.


“만일 네게 어떤 위험이 생긴다면, 이 크리스탈을 하나씩 던지렴. 그럼 문제가 해결 될거야. 이 크리스탈들에는 요술이 걸려있거든.”


“감사합니다.”


마야가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야카는 마야가 배에 타는 것을 지켜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야가 자리에 앉자, 배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베베는 눈을 꿈뻑이며 선내를 살폈고, 그런 베베의 모습을 보며 마야는 주먹을 꾹 쥐었다.


‘베베의 운명이 정말 바뀔 수 있을까?’


마야의 마음 한 구석은 불안이 차지했고,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또 다른 구석은 용기로 가득했다. 두가지 감정은 마야 내면에서 부딪히지 않고, 자신의 구역을 정확히 지켰다. 앞으로의 긴 여정을 상상하며 마야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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