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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II제이 Apr 05. 2023

강파르다 (23년 4월 상순의 순간)

아직 자라지 못한 것은, 약하기보다는 강파르다.


강파르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뾰족해진다. 생각이 강팔라진다. 나의 힘듦이 보자기처럼 내 내면을 둘러싸고 여유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사실은 뾰족해지는 것도, 강팔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뾰족하고 강파른 나를 가릴 여유를 잃는 것일뿐.


  축구를 하다 다친 일이 있었다. 상대방의 태클을 피해 점프하고 착지 하다 발바닥이 아닌 오른발 옆 날로 땅을 디뎌 인대가 찢어졌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그 사람만 보면 뾰족하게 모가 드러났다. 눈빛도 서늘해졌을 것이다. 발목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 다른 좋은 계기로 재미를 붙인 배드민턴을 무리해서 치다가 종아리 근육을 다치고 절뚝 거리며 그를 보면서 ‘아, 내가 내 스스로 다친 일은 내가 원인인데도 나를 미워하기보다는 변명과 이해를 해주는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걸고 넘어져 크게 원망을 하는구나’하고 깨닫기 전까지 그랬다. 사실, 아직도 마음에 약간의 쓴 앙금이 남아 있어 오른 발목을 생각할 때마다 씁쓸하긴 하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나의 ‘자기 사랑’을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곤 한다.


  나의 강파른 생각과 뾰족한 마음은 종종 나를 반성하게 한다. 주로 그 강파름과 뾰족함을 덮어주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나로 하여금, 이 강파름과 뾰족함을 덮을 수 있게 한다. 지난 주말 텃밭을 정리하며 비닐 멀칭 작업을 했다. 작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냥 텃밭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삽질과 비닐 씌우기, 모종 심기는 내게 꽤 힘든 일이었다. 물론 이 힘듦은 내가 땅값 20만원과 비닐 멀칭 값 만 팔천원, 그리고 모종 값 등등을 치러가며 선택한 것이었지만. 내 속이 앙상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충분했냐하면, 내가 가진 삽의 작음으로 부터 시작해서, 똑부러지게 정사각형이 아닌 밭의 모양이나 신발 바닥에 묻어나오는 진흙 같은 것들이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약간 쌀쌀할까봐 그대로 입고 나온 윗 내복에 대해, 반팔이 아닌 내 겉옷에 대해, 그리고는 하필이면 올해 유난히 일찍 따뜻해진 날씨에게까지 짜증이 나는 것이다. 혼자 작업을 하는 나를 걱정하는 아내의 전화가, 아내가 오늘 같이 나와서 밭일을 하지 못하도록 굳이 작년 7월을 골라 태어난 셋째가, 그리고는 같이 일을 하실 거라 믿었던 장인어른을 못나오시게 한  장인어른의 삐끗한 허리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나의 강퍅한 마음의 절정은 밭주인 할머니께서 옆자리 텃밭을 다듬는 지인들에게 대파 두 움쿰을 주는 장면을 봤을 때였다. 분명 나도 여기 있는데 밭주인 할머니께서 대파를 옆자리 사람들에게만 줬다. 딸려나오는 생각들. 여기에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다. 바싹 말라 비틀어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빈곤한 상상력은 알맹이 없이 까칠하기만 한 생각을 낳고 또 낳는다. 


  일이 거의 마무리되고, 기구를 정리하는 때였다. 기구처럼 마음과 생각도 정리가 되면 좋았겠지만 삐딱한 마음은 이미 주인 할머니를 껄렁하게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내 마음을 덮었다. “그 집도 파 좀 줄까? 누군 주고, 누군 안주면 섭섭하려니. 그쪽은 남편이 나와서 어떨지 모르겠네.” 아. 그때 나는 이해받은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내가 몸이 힘들었구나. 고작 대파 두 움큼에 마음이 흔들릴만큼, 날씨와 셋째와 장인어른의 아픈 등까지 질질 끌고와 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할 만큼. 그리고는 당연하게 올라오는 부끄러움. 이 무슨 대단한 노동인가. 이 무슨 거창한 작업인가. 나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 나는 참 약하구나. 너무나 약하구나.


  마음이 뾰족해지고, 생각이 강팔라지는 것은 몸이 힘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냥 아직 마음이 덜 여물어서, 생각이 덜 자라서, 몸이 약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듯하다. 나는 더 자라야 한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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