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답게 설명했지만, 엄마답게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과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강단에 선다.
문제를 푸는 방법이 있고, 설명하면 이해되는 세상을 살아왔다.
그래서 내겐 말이 중요했다.
잘 설명하면, 잘 풀린다고 믿었다.
딸과 대화할 때도 그랬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내 입장에서 얼마나 걱정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건 엄마 생각이지.”
“됐어,”
“왜 자꾸 나한테만 그래?”
그 말들이 내 가슴을 조용히 긁고 지나갔다.
나는 도와주려 한 건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토록 벽에 부딪힌 기분이 들까.
아이 앞에서 나는 자꾸 박사처럼 말하고, 엄마처럼 상처받았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구조화하려는 습관이
아이에게는 ‘통제’나 ‘불신’으로 다가갔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말은 감정인데,
나는 늘 논리로 답했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이렇게 하면 더 나을 수 있어.”
“이건 이렇게 접근해야 해.”
나는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그 안에서 이해가 아니라 압박을 느꼈던 것 같다.
딸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아이였다.
때론 나보다 나은 관점도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설명하려 들었을까.
어쩌면 나는 지식의 힘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논리로 꿰뚫고,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면 아이도 따라줄 거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방정식이 아니었다.
그건 느껴야 이해되는 세계였다.
어느 날, 아이가 무심히 던진 말이 마음에 꽂혔다.
“엄마, 너무 설명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면 안 돼?”
그 한마디에 나는
내가 그동안 해온 말들의 무게를 처음으로 돌아보게 됐다.
나는 아이를 도우려 했지만,
정작 아이는 설명보다 공감,
정답보다 경청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바로 조언하지 않기.
먼저 판단하지 않기.
아이의 감정이 지나가도록 기다려주는 엄마 되기.
내 박사학위는
지금 이 순간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긴 공부 끝에 얻은 성찰 하나는 있다.
모든 문제는 정답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먼저라는 것.
딸 앞에서 박사학위는 무용지물이지만,
엄마라는 역할 앞에선
내가 배운 모든 것이 다시 ‘인간적으로’ 다듬어지고 있다.
문제는 풀었지만,
아이의 감정은 같이 겪어야만 알 수 있었다.
공부는 멈췄지만,
나는 이제야 진짜 배움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