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르히아이스 Aug 24. 2018

4. 연령에 따른 사랑

연령에 따른 사랑

 사랑은 나이와 관련 있을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가져볼 텐데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관련이 있다! 반대의 답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경험을 안고 사는 존재이고 나이가 들면서 정신과 육체가 모두 변하기 때문에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연령의 영향을 받는다. 찬찬히 10년 주기로 연령에 따른 사랑을 구분해보자.


유년기의 사랑

 유년시절이라고 해서 사랑이 없을 것이라고 미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사랑의 3요소로 지칭한 사람, 신뢰, 애틋한 감정이 모두 있기 때문에 이 나이에도 사랑을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인기있는 아이들이 있다. 독점적 친밀감을 추구하므로 일반적 우정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다만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정신연령이 낮아서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는 나이라 여자 쪽에서 마음이 있다고 해도 쉽지 않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보면 어릴 때부터 모든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능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는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는 것만 다르다.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만 되어도 예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구분할 줄 안다. 우리는 어린 나이의 사랑을 쉽게 무시해버리지만 우리가 어리다고 하는 것도 사회적인 구분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사랑이 갖춰야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오히려 사랑 이외의 문제가 개입하지 않아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목격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10대의 사랑

 10대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남녀는 대부분 학생이고 비슷한 일상을 보낸다. 부모의 격차가 아닌 개인의 격차는 별로 없다. 학벌도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비슷한 세대로서 동질감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쉽게 가까워지고 부모 직업 간에 격차가 있어도 사랑이 생길 수 있다. 이때의 사랑은 본능적인 것에 가까우며 신뢰가 깊은 사랑이다. 주로 같은 사회집단에 속해있거나 이웃 등 가까운 거리의 사람과 감정이 생긴다. 

 요즘엔 인터넷 등을 통해 해외에 있는 사람과도 소통하고 SNS를 통해 이성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지리적 거리감은 다소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종, 국가에 대한 경계도 낮아져서 사실상 세계인이라는 울타리 안에 남녀의 구분만 있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도 주목할 부분이다.


 10대는 남성, 여성 모두 이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때이며 서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실패의 확률도 크다. 첫사랑이 대부분 실패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20대 초까지만 해도 여성은 남성에 대한 선입견이나 이성교제 부담이 적어서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남성 입장에서는 사랑이 쉽다고 여길 수도 있다. 보통 어느 동물이나 암컷에게 수컷이 구애를 펼치는 게 일반적인데 20대 초까지의 인간 여성은 오히려 적극적인 편이다.  


 그래서 이때 만난 커플들을 보면 과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싶은 경우도 많다. 그만큼 주변 요소에 대한 고려가 없이 당사자만 바라본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어찌 보면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나이대의 사랑이 경험치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이뤄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0대의 사랑은 의도치 않게 깊은 사이가 되기도 하는데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진로는 고민되지만 오늘의 사랑을 내일로 미룰 나이는 아니다. 30대가 되면 점점 중년 이후의 삶을 걱정하게 되지만 10대의 이들에겐 아직 머나먼 이야기이다. 그저 오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싶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사랑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10대의 사랑이 잘못되면 그것에서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그 트라우마로 인해 20대의 사랑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남성은 편견이 생기기 쉽고 여성은 자기방어적이 되기 쉽다. 20대의 성인 중에서도 10대의 트라우마로 인해 사랑을 두려워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보다 훨씬 늦게 성장하며 경험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대에는 경험을 많이 해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실패해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이 나이 때에 그다지 특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서 사랑하면서 그렇게 속 썩을 일도 많지 않다. 이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그렇게 큰 손해 볼 것도 없기 때문에 경험을 쌓기엔 좋은 나이이다. 나이가 들고 요령이 생기면서 인간은 조금씩 사악해진다. 나중에는 성격 맞추기만으로도 피곤해진다. 그래서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기가 더 어려워진다.


20대의 사랑

 20대의 사랑은 풋사랑을 너머 이제 본격적인 사랑을 할 때이다. 사랑이 꽃피우는 나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사랑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고 만남의 기회도 많은 시기이다. 아무리 혼자 지내려고 해도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것이 이때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안 하고도 중요한 구분 기준이 되는데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가 그나마 10대의 연장선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때 사랑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형성된 가치관을 기본으로 자기만의 연애스타일을 갖추게 된다.


 사회로 나와 돈을 벌기 시작하면 사랑의 모습은 본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능력이 사랑의 기준에 포함되며 득실에 대해 민감해진다. 물론 사랑에 빠져 물불 안 가리는 상황은 예외이다. 20대 후반에는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데 경제적인 부분이 점차 비중을 키워나가는 시기가 된다. 서양에서는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 등 독립을 준비하면서 자립을 일찍 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회생활을 일찍 하지만 경제력은 사랑의 조건에 많이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서구의 문화가 영향을 준 것으로 남에게 비치는 모습을 중요시하는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남보다 나아야 만족을 얻는 문화가 일부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기준이 내가 아닌 남이 되는 순간 영원히 만족하기 힘든 굴레에 갖히기 쉽다.


 결혼을 사랑의 조금 더 성숙된 단계가 아닌 결말이자 완성으로 보는 시각에서 볼 때는 서로 간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무시할 수 없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유럽보다는 동양에서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결혼을 너무 중시하게 되면 형식에 집중하게 되고 이것은 곧 물질과 외형에서 만족을 찾으려 노력하게 만든다.

30대의 사랑

 30대가 가까워지면서 이제 사랑은 정착을 원한다. 결혼을 고민하기 시작한다는 얘기다. 30대의 사랑은 결혼을 위한 사랑이고 결혼을 위한 리허설과 같다. 선진국에서는 결혼이라는 이벤트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라서 리허설 따위는 필요 없는데 한국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결혼이 인생의 클라이막스이자 결론이라고 생각해서 더 신중해진다. 


 30대 초반에 결혼을 하지 않고 후반으로 간다면 대체로 이성을 택하는 기준은 더 까다로워진다. 이때에는 결혼이냐 장기연애냐를 선택해야 한다. 20대의 날카롭고 열정적인 면은 다소 둔화되고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은 더 강해진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강한 의지와 정렬, 에너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쇠잔해진다. 성격은 시간을 거치며 이리저리 깎이면서 두리뭉실해지고 감정의 높낮이가 작아진다. 감정 변동의 폭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신체의 활력도가 떨어질 수록 능동적인 에너지는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쌓인 선입견과 경험이 사람을 재밌고 보람있는 것보다 편한 길로 유도한다. 뭔가 변수가 있고 도박이 있는 길은 배제된다. 그래서 정열을 발휘할 기회도 쉽게 오지 않는다. 그게 30대의 사랑이다. 30대 후반에는 사색이 많은 사랑을 하게 된다. 몸이 먼저 다가가는 20대의 사랑과는 다르다. 30대 후반에 오면 자기만의 기준과 세밀한 가치관이 모두 맞아야 사랑이 이뤄진다.


 가치관은 나이가 들수록 각자 더 독특해지기 때문에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10대의 사랑에서는 오직 감성만 맞으면 되기 때문에 사랑이 쉽다. 그러나 30대의 사랑에서는 못생긴 상대를 만나는 것보다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상대를 더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잘 맞는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


40대의 사랑

 40대의 사랑은 풍파를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시작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감정이 크게 분출된다. 이때에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가치관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것, 습관적인 것 등 공통점이 많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의 만남으로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어렵지만 일단 서로의 동일성이 확인되면 훨씬 빨리 가까워진다.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매너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서로 시행착오를 겪거나 오해하는 일도 적다. 선수들끼리의 만남이기 때문에 계산도 빠르고 위기대처에도 능하다.

 하나 주목할 점은 30대 후반부터는 사랑을 하더라도 설렘의 강도가 낮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사랑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감성의 비중이 낮아지고 이성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성 비중이 큰 사랑은 눈에 보이는 조건을 통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설렘도 줄어들고 순수성 또한 잃어버린다면 도대체 나이 들어서의 사랑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이가 든다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고 명확히 정의 내리기 힘든 일이지만 일단 40대를 기준으로 보자. 이 나이대가 되면 기본적으로는 몇 번의 사랑에서 아픔과 기쁨을 경험해본 나이다. 소위 단맛 쓴맛 다 본 나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정보에 의존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 성실함은 다소 줄어든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랑에서도 효율적인 것을 많이 생각하고 빨리 결과가 나올 만한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을 가지고 있다던가 가족 중에 나를 고생시킬만한 사람이 보인다든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든가 하는 어쩌면 본질적인 사랑과는 별개의 사안들이 눈에 더 크게 보이는 나이이다. 40대 이후는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다. 뻔히 보이는 고생길에 뛰어들 용기도 그걸 견뎌낼 인내심도 젊을 때에 비하면 부족하다. 앞날에 대한 예측력이 좋아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작은 단서들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더 리얼하게 상상해낸다.


 40대 이후 이해심은 다소 늘어난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격과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이란 대체로 나이가 들면 온순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마찰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경제논리를 삶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과 마찰이 많으면 많을수록 피곤해지고 에너지 낭비가 심해진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이므로 가능하면 참아야 하는 것도 나다.


 이해심은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도 의미한다. 한 가지 측면에서만 보았던 젊은 시절에 비해 여러 가능성을 짧은 시간에 검토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가 줄어든다. 상황에 대한 대처도 훨씬 능숙하다. 이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요령이다. 


50대의 사랑

 50대의 사랑은 어떨까? 이 나이쯤 되면 대부분 결혼을 했을 것이고 애들도 한 참자랄 나이이다. 결혼을 안 했다면 40대와 큰 차이는 없다. 육체가 더욱 힘을 잃어 가는 시기이므로 안정적인 삶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더욱 넓고 노련해진다. 사람을 보는 것도 마찬가이다.

 남성의 경우 여전히 욕구에 기반한 사랑을 찾을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을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는 여성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여성은 이 나이대에서는 매우 보수적으로 변한다.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고 잘 살아왔고 어차피 가정에 대한 본능적 필요성은 접은 지 오래다. 굳이 가정이라는 굴레로 들어갈 이유도 별로 없다. 결혼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그래서 지금 나의 사생활을 해치지 않고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찾게 된다.

 50대에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적다. 20대가 찰흙이라면 50대는 시멘트이다. 남에게 맞춰주기도 어렵고 내자신을 변화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지도 확신이 없다. 과거가 많아지는 나이이므로 상대방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기본적으로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다만 나이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소신을 포기하고 사랑을 이루는 데 올인하는 쪽과 장기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끝까지 자기 생각을 지키려는 쪽으로 나눠진다.


 결혼한 50대는 어떨까? 가족과 일에 밀려서 이성의 사랑이라는 것은 침대 밑에 숨겨두는 나이이다. 부부에게는 육아와 경제적, 사회적 성장이 동시에 맞물리기 때문에 사랑놀음을 할 여유가 별로 없다. 파트너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크게 자리 잡아서 잘못하면 한쪽이 소외되는 경우도 일어난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아이란 어떤 의미 일까? 동양에서는 아이를 결혼의 결실을 넘어 결과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가족을 중시하고 자식사랑을 강조하는 문화적 특성이라고 할 텐데 이것도 너무 과하면 안 된다. 서양에서는 아이가 있든 없든 다소간 차이는 있어도 부부간의 공간과 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국의 아기들이 부모와 함께 잠을 자는 반면 선진국들에서는 보통 요람에서 혼자 재운다.


 우리나라에서는 온 집안이 아이의 공간이고 모든 물건이 아이를 위해 배치되어있다. 1순위가 아이이고 개인생활은 없다. 이것이 어쩔 수없다는 변명으로 자리 잡으면서 부부 사이가 점차 이성이 아닌 동거인의 관계로 변한다.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업자나 룸메이트 같은 것이다. 애초 사랑의 감정이 식어갈 만한 시기에 아이까지 가세해 두 사람의 관계를 건조하게 만든다. 두 사람의 감정이 사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서로가 독립된 개체가 아닌 아이에 종속되는 협력자가 되고 서로 잘 보이려는 노력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오픈하고 나의 마지막 절제, 조심성마저 버려버린다. 남매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국부부들의 권태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50대의 사랑은 원숙의 사랑이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일단 시작되면 서로에게 가장 알맞은 사랑을 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다만 설렘이나 감성적인 요소는 많이 빠져있어서 희생이나 무조건적 이해는 기대하기 힘들다. 첫눈에 반하는 나이가 아니란 얘기다.

사랑의 변질에 대한 저항

 자식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것과 부부의 사랑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남녀가 조금 다르긴 한데 결론적으로 사람은 제한된 시간과 마음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모두에게 똑같이 큰 사랑을 줄 수는 없다. 즉 1/N이 되는 것이다.

 마음에는 크기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한번 잘 생각해보라. 아무리 수완이 좋은 카사노바라도 동시에 두 명을 만족스럽게 사랑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을 생각하면 한 사람은 잊어진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거의 올인을 할 경우에 부부간의 사랑은 전과 같이 유지되기 어렵다.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현상유지는 할 수 있겠지만 이 상태에서 사랑은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앞선 챕터에서 사랑은 항상 우상향이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나아야 하고 사랑은 더 커져야 한다. 그 곡선이 멈추는 순간부터 사랑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미래를 위해 아껴둘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항상 페달을 밟아줘야 한다. 사랑이 일단 소멸되기 시작하면 막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자식이라는 독립된 객체를 만들어냈다면 이제 다시 본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식에겐 그들의 인생과 사랑이 있고 부모에겐 그들의 남녀로서 사랑이 있다. 


 50대의 사랑을 정(情)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은 분명히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서 애틋함과 간절함을 쏙 빼버린 마치 맛없는 저지방 우유와도 같다. 정은 개나 고양이에게 줄 수 있고 이웃 간에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파트너와 가지기엔 너무나 차별성이 없다. 


 사랑도 일종의 에너지와 같아서 무한히 성장할 수는 없고 결국 어느 시점에는 변곡점을 맞이하게 마련인데 이 시점을 한참 지나 완전히 소멸하는 단계에 가면 정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즉 사랑의 관성만 남아 사랑 자체를 움직이는 힘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저 어제의 상태를 오늘도 유지하고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이 아니니까 의미 없고 결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더 편한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을 원한다면 그런 상태로 빠져들지 말아야 하며 그곳에서 빠져나올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소멸하는 것은 에너지의 소멸과 같다.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현상태라도 유지시킬 에너지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석탄도 석유도 필요 없다. 노력만 있으면 된다. 둘이 서로 배려하고 위하려는 마음만 계속 되새기면 된다. 매일 마중 나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나의 식사를 마련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으며,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어떤 일이라도 하는 것이 나의 파트너로서의 의무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반복되는 것에 대해 늘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일말의 사랑이 있으니 오늘 아침밥이 차려져 있는 것이다. 그 에너지를 더 키우려는 페달질을 멈추면 안 된다. 꼭 50대가 아니더라도 사랑이 정으로 변질되고 종국에는 딱딱한 시체로 변하지 않도록 매 순간 노력을 멈추면 안 된다.

 사랑이란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이대건 사랑은 있고 그것을 위한 인간의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잊어가는 인간이 많아지는 것뿐이다. 육체의 쇄락은 의욕을 상실케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상태로 가는 것이 노년의 배드 케이스이다. 어느 나이 때라도 사랑을 잊지 말자. 그것이 중요하다.

이전 03화 3. 경험이 주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