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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Aug 14. 2018

2. 사랑과 비슷한 감정들

사랑과 비슷한 감정들

우정

 인간의 감정은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단지 유사한 감정일 때도 있고 다른 감정들과 섞여있을 때도 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우정과 사랑을 보자. 둘은 어떤 차이일까? 성적 교류가 있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고 여기에 애끓는 마음이 있느냐도 볼 수 있다. 이성 간에도 우정이 존재하고 약간의 스킨십도 동반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성만 가지고 우정을 판별할 수는 없다. 남녀는 동성친구 간에 각자 방식으로 스킨십을 한다. 남자들의 경우 보통 어깨동무를 즐겨하고 손은 잡지 않지만 하이파이브나 주먹을 부딪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여자들의 경우 손을 잡고 팔짱을 끼거나 남자보다 더 긴밀한 스킨십을 한다.  


 여기서 스킨십 강론을 할 것은 아니므로 우정에 대해 좀 더 깊은 얘기를 해보자. 우정은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중 하나이다. 실제로 우정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정에는 희생이나 본능적 요소가 모두 있지만 그 정도가 사랑보다 덜하고 가슴 뛰는 애정이 결여되어 있다.


 대신 우정은 사랑보다는 수명이 길고 별일 없으면 쉽게 유지된다. 심지어 몇년 만에 만나도 이상하지 않게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 초등학교 동창과는 수십년 만에 만나도 즐겁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어울리는 것이 가능하다. 사랑은 계속 페달을 밟아주지 않으면 소멸해버린다. 우정과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다.


 사랑은 단계가 있으며 항상 상향식으로 진행해야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의 생명력은 약해져 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사랑도 죽어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우정과 사랑을 쉽게 착각한다. 실제로 초기단계의 사랑은 우정과 큰 차이도 없다. 아주 친한 이성친구과 연인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다르다고 한다면 친구끼리는 서로 잘보이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성친구라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은 있지만 내가 잘보여야 되겠다는 마음은 없다. 


 친구와 연인의 가장 쉽게 구별되는 것은 스킨십 수준의 차이일 것이다. 해묵은 논쟁을 하나 끄집어내 보자면 이성 간에 우정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현재 시점에서만 답을 말할 수 있다. 현 시점에 그들은 친구이고 우정이 깊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얼마든지 사랑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동성일 경우 사랑으로의 감정 전이를 막아주는 하나의 벽이 되지만 그것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 진전을 막을 장애요소는 별로 없다.


 동성 간의 장벽도 뛰어넘는 인간이 이성 간에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이겨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는 이성 간에 우정이 가능하다는 명제는 항상 한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국경, 나이, 직업, 신분등 모든 것을 초월한다. 생명의 위협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그만큼 강하다.

존경(동경)

 사랑과 비슷한 감정으로 존경이라는 것이 있다. 존경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꽤 있다. 오히려 존경에서 출발한 사랑이 깊고 오래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존경이라는 것은 두사람의 수직적인 관계에 기반하고 있고 사랑보다 안정되고 믿을만한 감정이기 때문에 존경이 바탕에 깔린 사랑은 매우 견고한 모습을 가진다. 스타와 팬의 관계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 등에서 이런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존경은 사랑과 유사하지만 큰 차이가 있는데 일단 분명한 상하관계가 있고 대체로 공적관계와 결합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도덕과 예의범절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존경이라는 감정은 두 사람간 격차가 있는 상태에서 생기기 때문에 이 또한 장벽이 된다. 지리적인 거리, 현격한 능력이나 배경의 차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재밌는 것은 가까운 사이에서 존경심이 발현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도 신이 아닌 하나의 생물로서 완전할 수 없고 장단점을 가진 존재인데 절대적인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불완전한 면들이 최대한 감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스타와 팬 사이의 사랑이 가끔 깨지는 경우가 이런 것에 해당된다. 우상으로서 바라보던 때와 실제 삶에서 그 사람의 모습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으로 시작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거리를 유지해야한다는 역설이 성립하기도 한다.

집착

 사랑과 비슷한 감정으로 집착이란 것도 있다. 앞에서 사랑에는 집착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착은 그 정도의 집착이 아니라 아주 강도 높은 집착이다. 이것은 사랑이 발전해가다 길을 잘못 든 것과 같은데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사랑에서는 균형이 중요하다. 집착은 한쪽의 사랑이 너무 큰 나머지 완전한 통제와 소유라는 병적 욕구로 변질되는 현상을 말한다. 집착하는 사람들은 집착도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집착을 당하는 사람도 집착하는 사람을 즉시 멀리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집착이 심한 상대방과 헤어지고 싶지만 그 사람의 반응이 무서워서 헤어지지 못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 상황은 상대방의 집착을 습관적으로 혹은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왔던 그동안의 관성에 갇혀 이것에서 벗어난 세계 즉 정상적인 사랑이 이뤄지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운 것이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보다는 오래된 커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랜 동안의 교육과 습관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집착이 사랑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사실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더우기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개선의 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고 두 사람의 최대 만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한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일방의 구속이자 소유일 뿐이다. 왕이 백성을 사랑하니 어떤 처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좋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오래가기는 힘들다.

이타적 사랑

 진부한 얘기이긴 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타적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위해 할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의 것들을 양보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상대방의 양보를 먼저 생각한다면 기본자세가 틀린 것이다. 무슨 분야든 좋은 자세를 가진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낫게 마련이다. 운동이든 공부든 예술이든 기본자세가 중요한데 이게 잘못되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서로가 만족하고 오래갈 수 있는 사랑을 하려면 이타적 자세는 필수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이타적어서도 안된다. 사랑이란 이타적인 것이지만 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이율배반적인 주장인가? 철학자들의 말장난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타성은 상대방이 행복한 모습을 볼 때 나도 행복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타성이 너무 강해도 사랑이 될 수 없다. 앞서 말한 균형이 여기서 필요하다. 나를 완전히 버리면서 상대방의 뜻대로 행동하고 내가 어떻게 되든 상대방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은 집착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극단적 사랑일 뿐이다. 균형을 잃은 사랑은 파멸로 갈 수 밖에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집착이든 과도한 이타주의든 당사자에겐 그것이 행복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나를 먼저 사랑한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먼저 바로 선 뒤에 이타적인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무너뜨리고 나서 사랑을 말하고 이타를 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 집이 무너졌는데 남의 집 문고리를 고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무리 일방적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가끔은 얻는 게 있기 때문이다. 9대 1이라도 얻는 게 있으면 인간이란 자꾸 그 1을 크게 보려고 한다. 지금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가끔 듣는 달콤한 한마디가 평생의 헌신보다 더 감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란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이다. 행복이 지속되면 만족감은 점점 줄어든다. 행복과 고통이 번갈아 오고 가급적이면 고통이 더 많아야 작은 행복도 더 크게 느낀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의 인간이란 이런 감정의 장난, 착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런 식의 굴곡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사랑과 인간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쓴 계기도 그런 것이고. 우리가 사랑과 인간에 대해 굳이 철할을 들먹이지 않아도 삶의 가치관을 제대로 정립하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점점 빨리 변하고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생각의 기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깊은 뿌리를 박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깊은 생각의 뿌리를 가진 사람은 더 성숙한 사랑, 더 수준 높은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끔 연인과 싸우는 문제들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상대방에게 준 상처가 정말로 통쾌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고 너 나은 관계를 정립하게 해줄 것이다.  


동정

 사랑과 비슷한 감정중에 동정도 있다. 동정을 타인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만약 사랑을 ‘희생’이라고 정의한다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인간사회가 각박해져 가고 있지만 인간의 근원에는 여전히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방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나온 마음이므로 사랑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똑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동정할테니까.


 가끔 동정과 사랑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와주고 싶고 내가 아니면 돌봐주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 특별히 그 사람에 대한 열정적인 감정이 없음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왜 이런 감정 혼돈이 생길까? 이것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모성애를 기반으로 한 생물학적 특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변변치 못한 남자를 만나서 혹은 악독한 남자를 만나는 경우 그 사람을 돕거나 교화시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뭔가 결여된 상대방을 내버려두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때문에 신경을 쓰게 되고 이것이 애착으로 발전한다. 


 동정 자체는 사랑이 아니지만 시작은 그렇게 했더라도 사랑으로 발전할 수는 있다. 애착이 생기면 애정이 생기고 이것이 두터운 감정층을 형성하면 사랑이 되는 것이다. 물론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애정에 대해 반응해줘야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동정은 순수한 어린 시절에 빠져들기 쉽지만 의외로 헤어 나오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에너지로 이끌어가는 것인데 반해 이것은 혼자 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지치게 되면 서서히 다른 생각이 들게 된다. 나쁜 남자를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을 교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나만이 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오해, 근본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 섞여 동정에 기반한 사랑을 만들어낸다. 성적 관계를 포함한 일반 연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동정에 기반하는 사랑은 뿌리가 매우 약하다. 존경에서 시작한 사랑이 점점 단단하게 굳어지는 반면 동정에서 시작한 사랑은 점점 더 약해진다. 동정이란 것이 처음 봤을 때 가장 강하고 익숙해질 수록 약해지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케이스는 주로 젊은 여성에게서 보이는데 사랑을 시작할 때는 이것이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처음 마주칠때는 매력보다는 갈등과 미움이 더 크겠지만 이런 나쁜 감정이 그녀를 한 남자에 집중하게 만들고 남자를 더 기억나게 만든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인데 한 연구에 의하면 나쁜 남자에게서 풍기는 비협조적이고 딱딱한 태도가 남성성과 혼돈을 일으켜 더 관심을 갖게 한다고 한다. 소위 ‘상남자’라고 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이다.


 본능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생물학적으로 종족번식을 해야 하고 여성은 자신을 보호할 가장 우월한 남성의 DNA를 원한다. 남성도 자신의 아이를 잘 기를 수 있고 성적 매력이 우수한 여성을 원한다. 그래서 불친절하고 거칠게 대한다는 느낌이 강한 남성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강한 남성을 원하는 여성이 이런 나쁜 남자를 택할 수 있다.  나쁜 남자의 성격은 자기가 교화시킬 수 있고 그래서 더 불쌍한 남성으로 생각하게 돼버린다. 착한 남자들보다는 나쁜 남자들이 인기가 있고(매력적이고) 기억에 남을 정도로 분명한 캐릭터가 되는 것이 이런 생각 때문이다. 착한 남자는 약해 보이고 나를 끌어주지도 못하고 무엇하나 시원하게 해결하지도 못한다. 사랑에도 확실하지 않고 내가 믿고 의지하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느껴진다.


 “성격은 뭐 같지만 가끔 웃으면 너무 온화해 보이는 그는 그 성격으로 볼 때 생각한 것이 있으면 사기를 치더라도 해낼 것이며 그게 가족부양이라도 아마 잘 해낼 것이다. 남에게만 나쁘게 대한다면 크게 상관할 것도 아니고 내가 속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틱해서 그를 만나는 것은 항상 나를 자극한다. 그의 본 모습은 가끔 보이는 그 웃음일 것이며 나라면 그를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정은 사랑의 전단계일수는 있지만 동정 그자체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습관

 사랑과 비슷하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감정으로 습관이 있다. 이것은 그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인 경우이다. 즉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연인의 형식을 취하지만 감흥이 없고 그저 매일 밥을 먹고 양치를 하듯이 마치 습관처럼 사랑을 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많은 이성을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자기들은 모두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틋한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면 그들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랑을 정의하는 특별한 감정중 하나가 애틋한 마음이다. 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행복감. 그 사람과 무엇이든 나누고 싶은 마음. 하나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런 것이 사랑에는 있다. 모든 감정들을 통틀어 사랑만이 이런 애틋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랑을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큰 틀에서 이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끔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그저 사귄 사람의 숫자만이 중요할 뿐 만났던 사람 하나하나는 별로 기억에 없다. 이런 사람은 바람둥이와는 다르다. 동시에 여러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한 시점에 한명을 정상적으로 사랑하지만 그 주기가 매우 짧고 감정의 기복도 적은 편이다. 


 주변에서는 능력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쌍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애틋함에서 에너지가 나오고 상대방의 반응으로 다시 에너지가 충족될 때마다 큰 즐거움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빠져버린 상황에서 그저 기술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사랑이라는 형태만 갖추고 있으면 기쁨도 얻을 수 없고 사랑의 에너지도 금방 소멸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00명이 사랑 경험이 있다는 것은 100번 헤어졌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다는 얘기이다.


 앞에서 불쌍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사랑을 하고 습관적으로 헤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흥미가 떨어지고 헤어져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 이 강박은 그 사람의 단점이 크게 보이고 집중하지 않게 되며 또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가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매번 이렇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이성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이라도 도 축복받았다고 말하기는 힘들것이다. 사랑이 항상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버리니까.


 반드시 한 사람을 오래 만나라고 추천하는 것은 아니며 그게 정답도 아니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하되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진실하고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벼운 마음이었다가도 진지해질 수 있고 그 반대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한때라도 진실하고 진지하면 된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진지하지 않다면 사랑의 깊은 면을 볼 수 없다.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사랑은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다. 오랜 기간 두 사람이 감정 교류 하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그 속에서 전에 발견하지 못한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복잡하기 때문에 이렇게 책으로 다뤄보는 것이 아닌가? 


 과거에 에리히 프롬도 그랬고 스탕달도 사랑에 대해 분석했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깔끔한 결론보다는 이상적인 것을 많이 다뤘다. 여기서는 현실적인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약간의 타협은 무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살아가야 하니까. 사랑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시작되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본능만으로는 사랑을 유지할 수 없기때문에 우리가 늘 안고 가야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저명한 세계의 석학이나 인기 있는 톱스타들도 사랑에 실패한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사랑에 대해 대처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만으로도 안되고 경험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사랑은 깊은 고민과 통찰이 필요하다.


결론

 이제 종합을 해보자. 사랑과 비슷한 감정으로 우정, 존경, 집착, 동정을 말했다.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이렇게 많았나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어차피 다 같은 감정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감정들이 무 자르듯이 한번에 하나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이런 것이 뒤섞여서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더 괴롭다. 


 이런 감정들을 하나씩 정의하는 것은 나의 역량을 벗어난다. 아마 인간을 만든 신만이 사랑의 주성분을 정확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열해보는 것은 사랑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필요하고 정의조차 하지 못하면서 사랑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해봤자 의미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말에 동의하든 안 하든 하나는 확실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행복한 감정으로 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이라는 것은 엉뚱한 방향으로 하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능하면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올바른 방향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에 가깝게 진행되도록 신경 써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이 책도 쓰고 있는 것이다. 도움은 얼마 안 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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