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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Aug 12. 2018

1.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 뭐예요?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신이거나 성인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일 것이다. 인간의 감정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며 믿을 수 없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인간이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감정을 넣는다면 가장 구현하기 힘든 감정이 사랑 아닐까.

 사랑은 다양한 인간 감정들이 섞여 형상을 만든 유기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속엔 어떤 감정들이 살아 숨쉬고 있을까? 


본능으로서의 사랑

 제일 먼저 인간의 본능적인 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본능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배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배우는 것들은 요령과 기술적인 부분일지언정 사랑의 본질에 관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본질적으로는 잊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쉽고 효율적인 사랑을 원하고 이것은 나중에 비용 대비 효과가 탁월한 하나의 사업 즉 인생의 과업이 되고 만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보다 얼마나 이익을 얻었느냐에만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사랑에서 느낀 그 짜릿함을 다음 사랑에서 다시 맛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능으로서의 사랑을 육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꼭 육체적인 것과 일치하지는 않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욕구과 본능으로서의 사랑을 혼돈할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내가 욕구를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욕구 이상이다. 하지만 욕구에서 시작한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 자체가 경계선이 명확한 것이 아니다보니 감정의 경계를 넘어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욕구와 사랑도 그렇다. 이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욕구에 충실한 동물이고 그것이 정신적 에너지의 요체라고 하는 학자도 있으니까.(이를테면 지그문트 프로이트)


 본능으로서의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욕구로서 사랑이다.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다 포함된다. 육체적인 것은 생물체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육체의 욕구이고 정신적인 부분에도 그만큼의 욕구가 존재한다. 대체로 여성의 경우 육체적 욕구는 남성보다 덜하고(정확히 말하면 1순위가 아니고), 육체적 관계없이도 사랑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정신적인 욕구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능으로서의 사랑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짧은 행복감을 맛보지만 이것은 지속적이지 않고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본능으로서의 사랑은 충족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충족되면 금세 무기력감이나 무관심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나고 주로 사랑의 앞 단계에서 주도적 에너지로써 작용한다.


집착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집착의 산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사랑도 그것들 중 하나이다. 이성을 만나고 의지하고 나의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장래를 약속하고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의미도 있지만 소중한 것을 나의 영역 아래 두고 싶어 하는 집착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이 심해지면 정신적 질환이 되고 너무 약하면 둔감한 사람이 된다. 어쨌든 최소한의 집착도 없다면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유지되기도 힘들다. 사랑의 독점성이 집착을 낳는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중에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받는 사랑이 충분하다고 해도 독점적이지 않으면 사랑의 기쁨은 반감된다.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 가치가 퇴색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집착과 소유욕, 독점욕이 적절히 섞인 정신작용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돌격이기도 하다. 사랑은 마음으로써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때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상대방이 부유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랑을 느낀다. 부유한 삶에 대한 동경과 어려운 삶에 대한 탈출 욕구가 버무려져 결국 일정한 사랑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보다는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사랑을 통해 그것을 얻는다. 이는 마치 수학공식과 같다. 


 그 사람이 명문대를 나오고 직업이 좋아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줌으로써 나를 더 완성시켜주고 그런 사람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이 만족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자유연애가 아닌 중매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오히려 연애로 만난 이들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주는 즐거움 또한 단순한 감성의 즐거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 동양이나 서양이나 정략결혼이 여러 왕국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보통은 한나라의 공주가 동맹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결혼 후 공주는 남편 나라의 왕족으로 행동한 경우가 많았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프랑스와 별 인연도 없지만 왕비가 된 후에는 자신이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 시대의 발상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이 당연했고 웬만해서는 딴생각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시대적인 요인을 뛰어넘어서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편을 따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시작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사랑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가 그런 예이다. 그녀는 원나라 왕족이었으나 고려로 와서는 공민왕을 충실히 보필하며 고려 사람으로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감성으로 느끼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감성이야말로 단편적이고 충동적이어서 대부분의 사랑이 안정적이지 못한 이유가 된다. 남녀는 각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사랑을 통해 얻으려는 본능이 있다. 여성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에 대한 동경을 통해 남성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남자다움, 남성스러움, 남자로서의 섹시함은 이런 의미의 사랑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동경은  출산과 양육, 희생과 치유능력 등이다. 이것이 왜 감성이 아니고 이성일까? 이것은 내가 불완전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든 부족한 부분이 있고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채워줄 수 있는 존재를 갈망한다. 사랑은 이런 동기에서도 출발할 수 있다.  


희생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희생이다. 교회 설교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두 사람 간의 사랑은 서로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내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고 때로는 일방적으로 베풀어야 할 때도 있다. 


 희생으로만 이루어진 사랑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도 희생으로 진행될 수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 끝이 안 좋게 끝날 가능성이 높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바로 서려면 균형이 필요하다. 사랑도 그렇다. 양쪽의 균형이 맞아야 최소한의 성립이 가능하다. 부모와 자식이 아닌데도 이런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니라 그냥 희생이다. 희생적 감정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대상이 잘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인간의 기본적 감성의 일부분이다.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랑을 정의하는 데 도전할 생각이지만 사랑은 변화가 심하고 인간 성격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케이스가 있어서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대체적 성격에 대해 겨우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본능이기도하고 집착의 성질도 있으며 희생의 의미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사랑을 단순히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만 생각한다면 사랑이 가진 의외의 모습에 놀랄지도 모른다. 상처받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알려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완벽한 정답이 있지는 않겠지만 사랑에 대해 우리가 고민한 만큼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서 배우게 된다면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상처도 덜 주게되고 보다 성숙한 사랑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연히 사랑을 지키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알려고 해야한다. 즉흥적인 마음으로 다가섰다갔다가 때로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얻을 수도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사랑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사랑을 알고 본질을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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