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오후에
방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따뜻하게
손을 데워주는
커피잔 속의
향기는 또
그윽하게
방 안을 채울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눈물이
뜨겁고 짠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새로 한 머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긴 꿈을 꾸고 난 것처럼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허기가 질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지겹게 느껴질 만큼
밖으로 나가고 싶어질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같은 공간에서도
너무 다른 입장과
너무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봄볕은
살갗을 간질이듯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가을바람은
심장을 휘돌아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남자의 한마디
메시지 같을 것이다.
잘 다려진 옷이
입고 싶어질 것이고
파랗게
뒤덮은 하늘이
그저 시원하기만 할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그 일들이
나의 하찮은 많은
기쁨조차 파괴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한없이 평화롭기만
이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
눈물을 멎게 하는 약
까만 공백으로 허기를
채우는 약.
그 약을 먹었다.
나는 이제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고
오로지 해맑게
기다리던 것을
향해 설 것이다.
그가 올 때까지
저녁을 기다릴 것이다.
비가 오면
우산 두 개를 들고
날이 더우면
땀 닦을 수건을 들고
새벽 적막이
진을 칠 즈음
나의 지워진 부분에
담을
분위기가 그럴듯한
나에게 미소 짓는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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