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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Aug 20. 2019

기억을 지우는 약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오후에 

방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따뜻하게 

손을 데워주는

커피잔 속의 

향기는 또


그윽하게

방 안을 채울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눈물이

뜨겁고 짠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새로 한 머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긴 꿈을 꾸고 난 것처럼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허기가 질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지겹게 느껴질 만큼

밖으로 나가고 싶어질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같은 공간에서도

너무 다른 입장과

너무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봄볕은 

살갗을 간질이듯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가을바람은

심장을 휘돌아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남자의 한마디 

메시지 같을 것이다.


잘 다려진 옷이

입고 싶어질 것이고


파랗게 

뒤덮은 하늘이

그저 시원하기만 할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었다.


몇 분이 지나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그 일들이

나의 하찮은 많은

기쁨조차 파괴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한없이 평화롭기만

이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약


눈물을 멎게 하는 약


까만 공백으로 허기를 

채우는 약.


그 약을 먹었다.


나는 이제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고


오로지 해맑게 

기다리던 것을

향해 설 것이다.


그가 올 때까지

저녁을 기다릴 것이다.


비가 오면 

우산 두 개를 들고


날이 더우면

땀 닦을 수건을 들고


새벽 적막이

진을 칠 즈음


나의 지워진 부분에

담을 


분위기가 그럴듯한


나에게 미소 짓는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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