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책을 한 권 읽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 있다. 이번 책은 서머 셋 모옴의 [달과 6펜스].
우리 집 책장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났다. 노르스름한 표지에 문고판이었던 같은데.
찾았다.
고갱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넘겼다.
속지에서 뜻밖의 메모를 발견했다.
선물 받은 책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책장 정리를 할 때 겉표지는 본 기억이 나는데 안을 들춰본 건 처음이었다.
글자를 몇 번 반복해 읽고 나서야 한 발 늦게 심장이 툭툭 널을 뛰었다.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가슴 한 편이 저릿했다.
복작복작한 여고 2학년 교실. 8반이었나? 몇몇 장면이 빛바랜 파스텔화처럼 그려졌다.
햇살 드는 창가 자리, 쉬는 시간만 되면 찾아오던 옆반 친구들, 점심 도시락 먹고 거닐던 교정, 등나무가 드리워진 벤치, 당시 우리의 최대 관심사였던 7명의 총각 선생님들, 앳되고 웃음기 가득한 아이들의 얼굴, 얼굴들....
지금도 만나는 친구들과 기억 속에만 있는 친구들의 열여덟 살 얼굴이 비교적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의 기억은 필터를 거쳐 미화되었나 보다. 하나같이 사무치도록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열여덟 살의 내 얼굴도 떠올랐다.
커트 머리에 핑클 파마라도 한 것 같은 반곱슬이 먼저 떠오른다.
컬이 있는 천연 앞머리 탓에 광견으로 불렸던 학주(담당 과목 : 국어)에게 첫날부터 찍혔었지. 학원이라곤 다닌 적 없던 시절, 학교 수업이 공부의 전부였기에 수업시간만큼은 눈에 불을 켰고. 의외로 성실한 수업 태도에다 결정적으로 자작시를 발표하는 숙제를 통해 그간의 설움을 날리고 달갑지 않지만 애제자로 등극했었지. 아무튼 문제의 반곱슬 커트 머리에 얼굴은... 또렷이 생각이 안 난다. 친구들 얼굴에 비해 열여덟 나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때는 거울을 많이 보지 않았었던가?
내 얼굴보다 더 문제는 그 시절 나의 맨 처음 짝이라는 '현'이 도대체 누군지 생각이 안나는 거다!!!
현아, 미안하다.
정현? 수현? 지현? 만나고 있는 고딩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을 한 장 넘겼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명조체로 쓰인 글자들. 종이에서 배어 나오는 오래된 책 내음.
가치를 모르는 주인 곁에서 얼결에 30여 년을 함께 지내온 책.
몇 번의 이사와 분가를 거쳤는데도 용케 소지품에 포함되어 곁을 지키고 있는 책.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노라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글에 세월이 함께 읽히는 것이다.
30여 년 전 스타일의 번역이라는 고정관념이 깡그리 사라지고 옛 글맛이 그대로 내 안으로 흡수되었다.
소중하고 귀한 명약이 우리 집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둘러쓰고 살았던 거다.
시각적으로 희미한 열여덟의 날들이 몇몇 지점에서는 놀라울 만큼 선명해진다. 후각이나 분위기를 떠올릴 때다. 등나무 꽃 향기를 떠올리면 나는 5월의 학교 벤치에 앉아 있는 것 같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의 따스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지금 친구 네댓이 책상에 걸터앉거나 창틀에 기대어 재재바르게 웃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면 문득 두려움이 훅 몰아쳐 들어온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30년의 간극을 감당하기가 버겁다.
시간의 흐름이 두렵게 느껴진다.
시커먼 파도가 치는 망망대해에 조각배를 타고 떠 있는 막막함.
우주의 크기를 상상할 때마다 느끼는 받아들이기 힘든 아찔함.
거대하고 무한하며 자의로 조절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경외.
무심코 넘긴 책장이 던져 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다.
[달과 6펜스]를 선물로 주었던 현.
네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그때는 분명 친한 친구였을 텐데. 이런 걸 시절 인연이라 하겠지. 씁쓸하고 아름답구나.
30년 동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도 놀랍지 않니?
내가 널 기억 못 했지만, 30년을 잊고 지나왔지만, 너의 30년이 부디 평안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