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들어야 맛이 나는 재즈

아트 페퍼 Art Pepper

by 이락 이강휘

무더운 여름날 재즈를 듣는 건 곤욕이다.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어두운 재즈클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습하디습한 지하, 그곳에서 흘리는 연주자들의 땀은 그들의 열기와 만나 축축한 습기를 만들어낸다. 재즈라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닌데도 그런 영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 그것은 내가 처음 구한 자취방의 습기가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대학교 3학년, 처음 구한 자취방은 부엌은 딸렸으나 햇빛이 비치지 않았던 단칸방이었다. 당시 친한 선배의 자취방에 부엌이 딸려 있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았던 경험 때문에 내 방을 구할 때에는 오로지 ‘부엌의 여부‘만 고려했었다.(저렴한 월세는 기본 옵션) 그러다보니 그 방이 절벽에 막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구조라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앉았다. 그 덕에 그 어둡고 좁은 방에서 물 먹는 하마를 예닐곱 마리를 키워야 했는데 녀석들은 항상 배가 불러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장마철이 되면 먹성 좋은 녀석들도 끝내는 흡수를 포기했고 덕분에 늘 축축한 상태로 지내야했다. 거기에는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던 부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햇볕의 소중함을 처음 알았다.

얘 없었으면...어휴, 생각도 하기 싫다.


무더운 여름, 재즈를 듣다가 그 어두웠던 과거의 상념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선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쿨 재즈, 특히 아트 페퍼 Art Pepper의 <Surf Ride>는 탁월한 선택이다. 흥이 넘치는 스윙, 눈 깜짝할 새에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속주, 멋스러운 편곡.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어두운 지하 재즈클럽을 연상시키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여름밤, 낮의 햇살을 가득 머금은 해운대 해변의 오픈 테라스 바에서 흘러나온다면 딱 어울릴 만하다.(폼 나게 ‘캘리포니아 해변’이라고 쓰고 싶지만 거긴 안 가봤으니 쓰기 민망하다. 제가 가본 캘리포니아비치는 경주에 있던 걸요?)


보기만 해도 시원한 재킷 사진

아트 페퍼의 부드러운 음색을 듣기에는 ‘Chili Pepper’만한 것이 없다. 흥겹고 대중적인 테마 연주는 처음 재즈를 듣는 사람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을만하다. 밝고 가벼운 아트 페퍼의 연주와 러스 프리먼 Russ Freeman의 경쾌한 피아노와 만나 뙤약볕 아래에서도 시원하게 들을 수 있는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피아노와 색소폰이 4마디씩 주고받는 감각적인 인터플레이도 재미있다. ‘Chili Pepper’만큼 가볍고 흥겨운 분위기의 곡인 ‘Tickle Toe’에서는 프레이즈 위를 서핑 하듯 자유자재로 타고 넘는 색소폰을 들을 수 있는데 아트 페퍼의 묘기에 가까운 연주를 듣노라면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의 이름을 <Surf Ride>라고 붙였던 사보이Savoy 레이블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게 된다.


레스터 영 Lester young의 깔끔하고 정갈한 음색 위에 찰리 파커 Charlie Parker의 속주를 얹은 아트 페퍼의 연주는 당시 재즈팬들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고 '다운비트 Dawn Beat'라는 재즈잡지에 색소폰 부문 독자투표 2위에 올랐을 만큼(1위는 찰리 파커) 재즈계의 저명인사가 된다. 이런 인기 덕분인지 1957년에는 저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의 마라톤 섹션을 몽땅 불러와 <Art Pepper Meets The Rhythm Section>이라는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굳이 비유하자면 마블히어로와 슈퍼맨의 만남 정도 되겠다.) 레드 갈란드 Red Garland의 강렬한 타건과 아트 페퍼의 부드러움이 만나 만들어내는 하모니, 폴 체임버스 Paul Chambers의 부담 없는 베이스 솔로와 필리 조 존스 Philly Joe Jones의 경쾌한 터치 등 감상거리가 풍부한 고급스러운 앨범이다. 하지만 <Surf Ride>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시원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앨범은 재즈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명반의 반열에 올라있기도 할 만큼 하드밥 앨범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앨범이지만 여름날에 적합한 재즈라는 느낌은 도무지 들지 않기에 여름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딱 봐도 제작비 많이 들었겠다 싶은 앨범

볕 안 드는 집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오는 곳은 좀 꺼려져서 웬만하면 지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운전을 하다보면 지하주차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길 수밖에 없는 법. 그때는 입구부터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근데 집에서 가까워 자주 들르게 되는 백화점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 백화점 지하주차장에는 항상 재즈가 들린다. ‘오, 이거 좋은데’라고 생각이 들어 검색해보면 대개 아트 페퍼다. 햇빛이 들어올 리 없는 지하주차장의 음습한 분위기는 그의 연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바뀐다. 여기에 재즈의 효용이 있다. 더구나 지하공포증을 치유할 만큼 강력한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백화점 방문을, 거기서 들리는 재즈가 좋아서 가는 거라고 곱게 포장할 수 있다. 물론 아무도 믿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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