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들으려고 맥주 마시는 겁니다.

빌 에반스 Bill Evans

by 이락 이강휘

처음 빌 에반스 Bill Evans를 접했을 때, 사람이 인상도 참 좋고 연주도 느긋하니 ‘이건 운전 할 때보다는 자기 전에 듣는 음악이군.’하면서 자기 전 머리맡에서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시각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해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낮에는 들리지 않았던 음들이 들리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곡이나 뮤지션 특유의 분위기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빌 에반스의 음악은 자기 전에 듣기에 적합한 재즈가 아니다. 변화무쌍한 에반스의 피아노와 과감한 스캇 라파로Scott LaFaro의 베이스에 오히려 잠을 설치기 십상이다. 빌 에반스하면 따라 붙는 ‘서정’이라는 말에 부디 속지 마시길.

빌리지 뱅가드에서 실황으로 녹음된 두 앨범(자기 전에 들으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빌 에반스는 술 한 잔을 따라놓고 듣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퇴근 후 편의점에 들러 네 개 만 원짜리 세계 맥주를 사가지고 와 들뜬 마음으로 한 캔을 ‘딱’하고 딴다. 그리고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를 트는 것이다. 오디오로 들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윗집, 아랫집, 옆집의 눈치를 봐야하는 아파트에 사는 형편이니 조용히 헤드셋을 끼고 듣는다. 그러면 빌 에반스와 폴 모션 Paul Motion, 스캇 라파로의 멋진 연주가 관중들의 잡담, 기침 소리, 박수, 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만들어내는 멋진 하모니가 귀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한 캔만 마시려고 했던 다짐은 ‘Alice In Wonderland’에서 한 번 무너지고 두 캔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마음은 마지막 곡인 ‘Jade Visions’에서 다시 깨진다. 급기야 <Waltz For Debby>까지 듣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계획과 달리 네 캔의 맥주를 다 마시고야 알딸딸한 기분으로 잠에 들 수 있다. 빌 에반스는 역시 이렇게 듣는 것이다.


교통사로로 요절한 스캇 라파로

빌 에반스 트리오에서 빠짐없이 연급되는 인물이 바로 스캇 라파로이다. 재즈베이스의 새로운 기준을 썼다는 그의 연주는 보통 피아노 뒤에서 백킹으로 리듬을 이끌어가는 베이스의 역할에서 벗어나 피아노만큼이나 적극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Waltz For Debby’를 가만히 들어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명한 테마 연주 후 이어지는 베이스의 과감한 솔로를 내팽개치고 피아노가 보란 듯이 제 갈 길을 가버린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던 둘은 마지막 테마가 나올 즈음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스럽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대개의 피아노 트리오가 그렇듯 피아노가 리드하는 곡이 많지만 ‘My Romance’에서는 오히려 피아노가 베이스의 길을 열어주듯이 비켜주는 모습도 보인다. 빌 에반스가 얼마나 스캇 라파로를 인정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느닷없는 교통사고로 최고의 파트너를 잃어버린 빌 에반스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을지 추측조차 어렵다. 꾹 다문 입술,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표정. 그의 인상에서 품어져 나오는 우울의 기운은 아마 스캇 라파로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의 음악은 대개 우울한 기운이 돌지만 그 속에서 서정이라는 미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드러머 폴 모션

이쯤 되면 안타깝게 요절한 스캇 라파로와 달리 노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폴 모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스캇 라파로와 빌 에반스의 자유로운 인터플레이가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드러머 폴 모션의 존재 덕분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지 쉬운 그의 브러시 연주는 자칫 잘못하면 멀어질 수 있는 피아노와 베이스를 ‘착착’하는 소리로 감싸 안으며 팀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후에 ECM에서 활동하며 훌륭한 연주자를 발굴하고 멋진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두 천재를 보듬어본 경험 덕분일 것이다.


이 세 연주자의 연주 외에도 이 앨범의 묘미는 또 있다. 바로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다. ‘Alice In Wonderland’를 들어보면 관중들의 잡담소리가 쉴 새 없이 나오는데(한 여자분이 술이 좀 과하셨는지 목소리가 우렁차다.), 대개 감상에 방해가 되기 마련인 소음이 연주와 만나 곡을 듣는 재미를 더해준다.(중간에 한 관중의 기침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음악 듣다가가 관중의 건강을 걱정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재즈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재즈라는 것이 본래 점잔을 떨면서 듣는 고상한 음악이 아닌 술집에서 배경음악으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제 아무리 빌리지 뱅가드 Village Vanguard라고 하더라도 당시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던 빌 에반스라는 뮤지션에 대한 관중들의 관심이나 기대는 그다지 크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다보니 음악보다는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연주자는 연주자 나름대로 ‘그래, 너네는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 꺼 하련다.’라는 마음으로 연주에 집중했을 테다. 그런 고집스러운 정신이 소음과 만나 무대의 현장감을 고스란히 담은 명반으로 남게 된 것은 후대 재즈팬들에게 큰 축복이라 할 수 있겠다.


글을 쓰다 보니 빌 에반스가 듣고 싶어진다. 특히 연주 중 들리던 잔과 잔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그립다. 오늘 퇴근길에는 편의점엘 들러야겠다.

1935년부터 지금까지 ,빌리지 뱅가드는 지금도 영업중(죽기 전에 가봐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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