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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용희 Oct 15. 2018

절망 편

용희사전 20

절망


절망을 해 본 적 있는가? 절망은 모든 것을 소멸시켜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절망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절망은 단순한 실패가 아닌 훨씬 쓰라린 상처라고 생각된다. 


사실 절망적인 상황들이 존재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는 경우도 존재한다. 


절망. 그것은 모든 것에 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의 계기가 되는 걸까? 


오늘은 절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절망의 사전적 의미는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라고 명시되어 있다. 


희망을 끊어 버릴 정도로 비극적인 상태가 절망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사람은 적어도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나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비극적인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실질적으로 승자가 있더라도 어느 쪽이든 비극적인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종종 우리는 삶을 전쟁에 비유하곤 한다. 실제 전쟁만큼 잔혹하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혹독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 치열한 삶 안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끼게 되곤 한다.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나에게 냉정하게 다가온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타인의 도움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망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고민에 빠진 친구들과 대화를 해보면 대부분 그 고민의 해결법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데 그것을 실현하지를 못해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고민과 절망은 큰 차이가 있다. 고민은 고민으로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절망이 절망으로 그친다면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절망은 상황적인 것이지만 내가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희망은 절망의 반대 개념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절망은 상황이 아닌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 포기상태라고 여겨진다. 절망적인 상황을 순응하는 상태로 끝없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보인다. 


요즘 인터넷이나 유튜브의 강연을 듣다 보면 결핍이 주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결핍은 부족한 부분인데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이야기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한창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은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철학가의 철학을 통하여 쓰인 책이다.


철학가 아들러는 어릴 적 공부도 못하고 키도 작고 못생기고 거기다 건강도 좋지 못했다고 한다. 굉장히 절망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핍 요소를 발판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이 생기게 되고 결국 의사가 되고 그 후에 철학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내가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대부분 자신의 결핍적인 요소로 인하여 절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사실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면 냉정한 판단을 하기 쉽지 않은 것은 맞다. 패닉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망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다. 분명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 절망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절망의 무게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만큼의 무게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전에 겪었던 절망적인 상황이 또 찾아온다면 그것이 과연 절망적인 상황일까?


절망은 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상태 그리고 상황이라 어려운 것인 것 같다. 


사람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그 낯선 절망을 이겨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절망을 경험하고 받아들여 더욱 성장해 나가기를 바란다. 


절망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끝이 날 것 같지만 삶은 끝나지 않는다. 삶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지는 삶을 절망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잡초 근성을 좋아한다. 뽑아도 뽑아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끝나지 않는 생명력. 그것이 절망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절망을 이겨내면 비로소 희망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절망은 농도 높은 희망을 갖기 위하여 겪어야 되는 관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소한 것에 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소한 것에 절망하기에는 우리는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올드 보이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웃어라 세상이 웃어 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희망은 새로운 희망을 낳고 절망은 새로운 절망을 낳는다. 모든 것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마음 아프지만 당신이 절망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눈치채거나 알더라도 같이 나누어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위로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까 절망하지 맙시다. 


분명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절망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익숙하지 않은 상태를 감내하길 바란다. 


절망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지만 나 역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다. 그 쓰디쓴 아픔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복되지 않은 절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생의 묘미이지 않은 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절망 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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