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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리영 Sep 29. 2024

길바닥에 돈을 버리고 살았던 부부

 대한민국 맨 끝 여수에서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살고 있는 우리 집은 지도에서도 끝에 위치한다.

끝마을에서 사는 나는 잠을 잘 때면 서울 쪽 그러니까 북쪽 방향으로 머리 두고 자지 않는다. 미신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서울을 생각하면 늘 고생스럽고 서러웠던 기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내 삶을 가난하게 만들었던 서울 가는 길.... 그쪽을 바라보면 아픈 기억만 가득하다.  서울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잠을 잘 때도 그쪽으로 눕지 않는다.


 만삭의 몸으로 콧가에 나도 모르게 재채기와 콧물이 나오려는 쌀쌀함이 서러움처럼 느껴질 무렵 3살 된  아이를 데리고 뱃속의 둘째 아이를 진료하러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게 되었다. 남편은 택시비를 아껴야 한다며 ktx를 타고 올라간 용산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로에 갔고 종로에서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늘 아껴야 했던 돈은 나의 발을 고달프게 했고 내 삶을 궁상맞게 했다.


그러다 한 달 후  출산을 했고 출산 이후 3주 만에 신생아인 아이와 첫 진료를 보러 서울에 올라갔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에 분유와 젖병을 가득 담고 아이용품을 지고 메고 기차를 탔다. 병원에 가는 기차는 새벽 5시 기차 해가 뜨기도 전에 나는 벌게진 눈을 겨우 뜨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몸조리도 하지 못한 몸으로 아이를 안고 남편과 맡길 데가 없는 큰아이까지 챙겨 서울로 향했다. 3주에 한번 2주에 한번 그렇게 신생아인 아이를 안고 해가 뜨기 전 새벽 5시에 출발해서 진료를 보고 여수에 내려오면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하루 왕복 13시간이 걸리는 일정을 아이를 키우는 동안 셀 수 없이 가야 했다.


 왕복 기차요금 포함 교통비는 매번 25만 원에서 30만 원이 나왔고 병원진료비에 가족이 끼니를 챙기기 위해 밥까지 먹고 나면 하루 45만 원 정도의 돈이 매번 들었다. 한 달에 두 번을 가면 거의 90만 원의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기 바로 직전 우리는 마이너스 통장이 가득 차서 더 이상의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모아지지 않는 재정, 어딘가 밑 빠진 독처럼 돈이 줄줄이 사라져 갔다. 아이만 수술받을 수 있다면 일차수술로 입술이 온전해진다면 돈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끼고 아껴도 채워지기는커녕 텅텅 비어 가는 통장잔고가 서글픔을 더하게 했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나에게 찔러대는 말을 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이와 병원에 가는 게 쉽지  않다는 나의 말을 듣더니 또 푹하고 찔러대는 한 마디를 한다.


아주 돈을 길바닥에 다 버리는구먼.


 누가 모르나 돈을 길에 버리고 싶겠는가 먹지도 쓰지도 못하고 안 그래도 아끼고 아끼고 살았는데 수없이 가야 하는 병원진료가 힘들고 서글프고 속상한 판에 우리의 재정상태를 적나라하게 찔러버렸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저 아무 말하지 않고 들어만 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10년을 서울을 오고 가는 길바닥에 돈을 버리고 사는 부부가 되었다.


 3살 된 아들에게 딱 맞는 옷을 사줄 돈이 없었다. 오래 입었으면 하는 마음에  본래 사이즈 보다 더 큰 사이즈를 사줘서 아이는 어깨가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었고 티셔츠는 원피스처럼 길게 내려와 있었다.  나는 신발을 살 돈이 없어서 한 신발을 마르고 닳도록 신고 다녔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안고 가다가 어느 날 푹 하고 발가락이 밑창사이로 튀어나와 버렸다. 놀이터에서 다른 엄마들이 볼까 봐 발가락에 힘을 주고 튀어나오는 발을 밑창에 붙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와 터져 버린 신발을 던지며 울어버렸다. 우리에겐 5kg가 돼야 하는 둘째 아이 분유와 기저귀값에 돈을 쓰는 게 우선이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큰 아들은  계란프라이에 간장을 넣어서 비벼 김치와 김을 싸서 먹으며 지냈다. 남편의 오래된 중고차는 길을 가다 서 버리기도 했다.




 하루는 아이가 먹고 싶다는 포도를 사주지 못해 미안함 마음이 들다 돈을 탈탈 털어가는 이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왜 아무것도 남지 않게 아니 더 혹독하게 비워가는지 나에게도 걱정 없는 재정과 넉넉한 돈을 주시라고 구하고 싶어졌다. 떼를 쓰듯이 울며 기도를 하고 있던 중 내 마음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출산 기념으로 찍어준 사진을 찾아보라는 마음을 주셨다.


[어딘가에 꽂아놓은 보고 싶지 않은 사진]

출산을 하고 퇴원을 할 때 건네받고 아이의 아픔이 적나라게 보여 찢어서 버리려다 남몰래 깊이 숨겨둔 사진이었다. 그냥 그 사진을 찾아보라는 마음에 주는 소리에 나는 책장 구석구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툭 하고 떨어진 막 태어난 핏덩어리 같은 아이의 모습


사진을 본 순간 소리를 내며  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있지 않았고 막 태어난 아이는 어떤 옷도 걸치지 않았다. 벌거벗은 채 가진 게 없이 태어났다. 40년 전 갓 태어난 내가 그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렇고 이제 막 태어나고 있는 모든 생명이 두 손에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태어났다.


공 수 래 공 수 거



그 순간 내가 깨달은 말이었다.


빈손으로 와서 (태어나) 빈손으로 간다 (죽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빈손으로 왔다 처음 모습 그대로 빈손으로 간다.


 [보아라 너의 약한 그 아이의 손에 무엇이 쥐어져 있는가? 아무것도 없단다. 인생은 그런 것이란다. 무엇인가를 쥐어보려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은 처음 온 그대로 다 놓고 가야 하는 것이란다. 빈손을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허무함이 가득한 인생 헛되고 헛된 인생이란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딸과 너의 가정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가 먹이고 입히고 필요한 것은 내가 채우리라.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너의 필요가 무엇인지 너의 걱정이 무엇인지 내가 다 안단다. 그러니 나를 믿고 너의 삶을 맡겨보렴 ]


나의 마음에 울리는 소리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궁핍했고 어려웠지만 헐벗지도 집이 없어 길에서 자지도 않았다. 그리고 적은 반찬이었지만 굶지 않았다. 털어져 가는 재정이었지만 어쨌든 채워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매 순간 삶의 필요를 채워가실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


 빠듯하고 어려웠던 삶에서 훈련은 시작되었다.  훈련을 통해 걱정을 미리 하지 않는 연습, 아직 일어나지 않는 내일 일로 오늘을 근심으로 채우지 않는 방법, 원망보다는 감사를 먼저 하는 마음의 습관을 배워갔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10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그때 그때 우리 가정을 채워갔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떠올리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을 미담처럼 풀어가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 "라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지만 빈손과 빈손의 사이 삶 가운데 적당히 채워가시는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너무 부하지도 않게 너무 가난하지도 않게 딱 우리의 필요를 채워가셨다.  앞으로의 글에서 채워감의 기적의 이야기들도 나눠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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