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꼬박 채워져 가던 즈음에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냐는 말에 진행 중이었기에 그 순간을 말하기 어려웠다. 내가 버티고 있는 이 시간에 과연 희망이라는 게 있을까? 평범한 삶 그리고 평온한 하루 평탄하고 평안하며 아무튼 평!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는 그 삶이 나에게 올지 궁금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무 고민이 없는 날이 잠깐이라도 찾아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고통스러운 순간에 미리 마음이 불안했다.
자율신경 실조증을 앓게 될 정도로 나는 불안도가 높았다. 아이의 뇌전증이라는 병은 나를 그렇게 만들어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 위를 걷는 사람처럼 삶에서 여유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늘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24시간 내내 잠자는 시간마저 편하지 않았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늘 열려있었다. 아이의 호흡소리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잠결에 움직이는 아이의 이상동작에도 민감하게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 호흡이 다시 돌아오게 해야 했다.
뇌전증은 어쩌면 지옥에서 온 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온몸을 뭔가에 묶어 어두운 영이 뒤틀며 꼬아버리고 말려 죽이려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부모는 바라봐야 했다. 아이의 눈은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검은 눈동자는 뒤로 돌아가고 흰자만 보인채로 아이는 파랗다 못해 검어진 입술로 거품을 내뿜으며 숨을 쉬지 못한다. 목구멍 안에 무언가가 말아들어가 드르륵 거리며 숨을 끊어내려고 한다. 시작하면 못해도 숨이 끊어지지 직전까지 아이를 괴롭힌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는 척하다 다시 시작한다. 아이는 딱딱해진 몸으로 마른 막대기처럼 삐그덕거리며 으윽 으윽 크윽 컥컥 거린다.
부모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은 자식의 아픔을 처참하게 바라봐야 할 때라는 걸 직접 경험하며 알았다.
처음 발작을 하고 응급실에 갔을 때는 잠깐 일어난 이벤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몇 달에 한 번씩 일주일 가까이 셀 수 없는 발작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평온하다 싶은 어느 순간 갑자기 걸어가다 뒤로 쿵! 하고 볼링공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머리에 충격을 크게 받고 쓰러져 발작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가는 교회에서도 아이는 발작을 하곤 했다. 사계절의 변화에도 아이는 유리알이 으스러지듯이 쨍그랑 거리며 요란스럽게 아팠다. 먹는 음식에도 예민했고 누군가가 피우고 지나가는 담배연기에도 과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낯설게 바뀌는 조금의 일상의 변화에도 아이는 얇은 종이장처럼 휘청거렸다. 위태로운 찻 잔에 곧 넘칠 거 같은 물처럼 내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을 떠안게 했다.
아이가 언제 쓰러질지 몰라 하루종일 안고 있어야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에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내 일을 봐야 했고 밥을 먹고 싶어도 옆에 앉혀놓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아이를 잡고 겨우 밥을 먹었다. 씻는 일, 어딘가를 가는 일이 아이가 보이는 뇌전증 전종증상에서 대발작으로 나타날까 봐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다. 삶의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마치 샴쌍둥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자웅동체인 양
4년 가까이지내야 했다.
심한 날은 잠을 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잠을 자는 동안 내내 그리고 깨어나서도 계속되었다. 치료되지 않는 난치병 수준의 아이는 약으로도 뇌전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멍하게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가 위험한 전조증상이었다. 이유 없이 침을 많이 흘리면 더 긴장해야 한다. 갑자기 고개를 약하게 그러나 이유 없이 끄덕이기 시작하면 한 번의 대발작이 일어나야 멈췄다.
아이의 뇌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타고난 염색체 질환과 연약함이 하나씩 존재를 감추고 있다 덮치듯 밀려왔다. 정신없이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했다. 그 순간은 아이의 목숨 그러니까 숨 한편을 잡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돈도 나의 건강도 집안일도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던 큰 아이도 신경 쓸 수 없었다.
또래보다 절반씩 느리게 자라는 성장속도도 어쩌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뇌전증의 영향이었는지 모른다. 온종일 침을 흘리는 아이를 붙잡고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밥을 한수저라도 삼키도록 매일 이유식을 갈아 한 입씩 먹여 올렸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리고 키워야 한다. 내 아이니까 나에게 맡겨진 생명이니까.... 그 마음에 하루 수백 번의 수저질을 했다. 수저를 쳐다만 봐도 수저고문 같아서 끔찍할 때도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심정이 들기도 했다. 수 없이 부어대지만 막아지지 않고 흘러내려가는 나의 수고로운 하루...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좌절이었고 그에 따라온 절망이었다. 빛줄기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헤어 나오지 못할 구덩이 안에서 울어봐야 내 소리만 들렸다.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답답함은 내 몸을 아프게 했다. 잠을 잘 때도 아이를 돌보는 온종일 어깨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려는 듯 무엇인가로 쪼개내는 통증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저절로 아아악.. 하고 비명이 나왔다. 너무 아파서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루종일 안고 수저질을 수백 번 했으니 양쪽 어깨가 남아날 수 없었다. 아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업은 채로 집안일을 해야 했다. 잠을 자는 중에도 아이가 숨을 잘 쉬나 수시로 일어나 확인했다. 몸은 쉬지 못했고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 시간이 몇일도 아니고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에게 발작만 없어도 우리 가족은 옅은 미소라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아 살 거 같다. 이 정도의 삶만 누릴 수 있어도 행복해. 남편과 나는 아이가 비록 말을 못 해도 또래보다 늦게 자라더라도 유리알처럼 약해서 언제 바스러질지 몰라 불안하더라도 발작만 없으면 살 만했다. 뇌전증이 없이 지나가는 하루는 잠 한숨 잠깐이라도 편히 잘 수 있었고 밥 한 수저가 입에 들어가 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되었다. 아이의 하루가 쓰러지지 않고 숨이 넘어가지 않고 그저 아무 일 없이 보낼 수 있기를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었다.
우리에겐 그때가 가장 힘든 순간들이었다.
10년의 시간 가운데 여전히 뇌전증이라는 잠재적인 병이 아이에게 머물고 있다. 다행히도 시간이 흐르면서 병이 주는 증상과 빈도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그토록 원했던 평온의 평! 이 내 시간에 절반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까지 오기 위해 아이의 엄마라는 주양육자로 시도해 온 돌봄의 방법이나 아이의 정서와 뇌 건강을 위해 했던 결코 쉽지 않았던 일상들을 추후에 나눠볼까 한다. (비슷한 병을 가진 누군가와 그 가정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