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기.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입덧도 없이 보낸 초기이지만 종종 쓰러져서 힘들었고 그래서 택시를 타기 시작하니 지출이 늘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악해졌다. 체크카드 사용으로 세팅했던 나의 경제상황은 신용카드의 사용으로 급격하게 무너졌다. 그 언젠가 체크 기능이 담긴 크로스마일 카드를 만들지 않은 나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출근길 평균 1만 원. 퇴근길 평균 9천 원의 택시비가 3달이 쌓이니까 다달이 40만 원.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주택담보대출원금과 이자로 나가는 돈이 커서 나의 한 달 가용 용돈은 고작 30만 원이었는데. 그걸 40만 원씩 써재끼기 시작하니까 답이 없어졌다.
더 난처한 건. 그렇게 산용카드를 다시 긁기 시작하니 통제가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다렸다. 빨리 안정기가 오기를. 나는 경제상황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스트레스의 강도가 매우 높아지는 인간인데 임신은 단순히 병원비를 제외하고도 나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지출을 계속 만들어냈다.
하루 휴가 내면 보건소 가서 받을 수 있는 기형아 검사도 미처 정보를 몰랐던 나는 병원서 돈 내고받았다. 어차피 지원금 안에서 쓰지만 그게 남아있음 그래도 병원비에 보텔수 잇는 거 아닌가... 머 이런 잡스런 생각을 하고 산다.
여하튼. 내 경제상황과 스트레스와 무관하게.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갈 때마다 주수에 딱 맞는, 매우 교과서적인 수준의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내 눈엔 그냥 정상수치 안에 있을 뿐... 뭔가 점점 정상수치의 끝자락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긴 했지만, 내 몸은 1주일에도 500g씩 살이 붙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란다. 태명의 기운을 잘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일 안도한다.
기껏해야 아기집 근처가 좀 단단하게 뭉쳐있는 정도였던 평평하던 아랫배는 쑥쑥 자라 이젠 누가 봐도 임신부의 풍채이다. 평소에 버스 지하철 타도 뱃지고 나발이고 양보 같은 건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요즘 버스에서의 양보는 꽤 빈번해졌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뱃지는 안 봐도 사람의 몸의 변화 정도는 보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그래서 성가신 일도 좀 있다. 택시를 탔는데 대뜸 몇 개월이냐고 묻는다거나, 단골 카페 사장님이 "딸인가요?"라고 묻는다거나... 어떻게 아셨냐고 했더니 자기는 아들만 둘이고 주위에 다 아들인데 느낌이 달랐다고 하시더라. 그나마 단골 카페 사장님의 질문은 커피에서 디카페인 커피로 주문내역이 변화하는 나와 내 몸을 보며 그럴 수 있다 싶지만. 역시 낯선 이들이 개월 수를 묻는 건 좀 불편한 일이다.
양치하면서 메슥거리는 것도 많이 가라앉았고, 음식 냄새에는 전혀 거부감을 못 느낀다. 고깃국도 느끼하다는 생각을 예전처럼은 안 하고. 식탐은 좀 생겼지만 소화가 워낙 안돼서 식탐대로 먹다가는 배가 찢어지게 아픈 상태가 돼버려서 의도치 않게 참게 된다. 물론 임신 전처럼 반공기만 먹는 건 불가능.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래도 밥을 2 숟갈 정도 남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다.
난 여전히 내 아이가 낯설고 어색한데. 나를 둘러싼 가족들과 동료들, 심지어 의사까지도 내 아이가 귀엽다고 한다. 근육도 없어서 누가 봐도 그냥 작은 해골 같은 저 조그만 생명체가 귀여울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한 상태.
모성애는 애를 갖자마자 생기는 게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정말 내가 그렇게 살 줄은 몰랐다. 이 아이가 건강할 수 있도록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의 수준일 뿐. 아직 사랑스러운 건 모르겠거든. 그런 나를 유별나게 볼까 봐 그냥 입 닫고 사는 것뿐이고.
안정기에 들어서서 제일 좋은 건 몸의 안정이었다. 문자 그대로 호르몬으로 요동치던 몸뚱이는 이제 좀 적응기에 들어선 듯하다. 지금쯤 여행을 가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난 주말 내내 귀차니즘으로 방콕이다. 큰고영의 연이은 출장으로 주말에 움직일 일이 없었는데. 정말 5주 연속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붙박이 상태. 사람들을 만나고 무언가 활동을 하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난 이렇게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는 건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회생활 17년 차. 많이 치져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사람도 안 만나기 시작했는데 임신은 좋은 핑계가 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나의 아이는 무탈하게 자라고 있다.
나의 상태는 평범했고. 특별히 과하게 이상하거나 아픈 증상 없이 내 몸은 잘 버텨내고 잇다.
안정기. 그게 찾아오자 나는 본격적으로 출산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의 안정기는 그렇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