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게 미니멀리즘

만사가 의욕이 없다.

by 김옥진

난 매우 소비지향형 인간이다. 특히 옷과 화장품 신발 등이 불필요하게 많다. 사실 그거만 많은 건 아니고 다 많다.


임신이 확인됨과 동시에 나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게으름'이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어서 쉴 수 있는 모든 순간은 누워서 보낸다. 마흔. 불혹의 나이에 겪는 임신은 일말의 에너지를 다 가져가 버렸다.


남들보다 늦은 결혼이었다. 38살에 결혼해서 마흔에 임신을 했다. 늦은 것은 그저 그게 나의 때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체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체력과 에너지는 이미 30대 중반에 방전되고 말았고, 사람을 만나거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는 매우 큰 결심과 활력이 필요한데 어느 시점부터 천천히 활력이 꺾이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결혼 준비, 이사, 논문 마감을 같이 돌리던 최악의 시절을 겪으며 일말의 가능성마저 제로가 됐고.... 결혼 후엔 밤 9시면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보약을 먹고 버티기도 했다.


그렇게 보약과 홍삼을 때려 부어가며 에너지를 겨우 올리고 있었는데... 떡하니 임신이 되고 나니 에너지 소비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누워야 했다. 난 가만히 누워 나의 에너지가 아이에게 고스란히 넘어가는 그 순간을 버텨야 했다. 젊디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젊음'이 주는 절대적인 에너지에 당황할 때가 있는데, 이 아이의 에너지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심지어 몸속에서 활기차게 성장하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2월 이후. 나의 퇴근 이후 시간은 그냥 '눕기'로 점철되었다. 씻는 것도 먹는 것도 다 귀찮은 그런 시간을 보냈다. 기초화장품을 얼굴이 7개씩 발라대던 내가 선블록 닦는 시간도 아까워서 선크림을 피하고 양산을 들기 시작했다. 팩은 언감생심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얼굴에 물이나 끼얹으면 다행일 지경. 그 와중에 호르몬 변화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턱밑 트러블이 나기 시작했으니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고 싶지 않아 지는 심경은 더 커졌다.


그러다 5개월이 돼서야 다시 선블록을 꺼내 드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그도 매우 귀찮았는데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서 방에 있던 화장품 몇 개를 욕실로 가져다 두었다. 얼굴을 대충 닦고, 그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고 바로 손을 뻗게 되니 그나마 좀 바르기라도 하더라. 엄밀하게는 5개월, 소위 이야기하는 안정기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나의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화장대에는 10개에 가까운 화장품이 있었고, 욕실에도 오만가지 팩과 클렌징 제품들이 즐비한 나다. 그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지 9개월째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되니. 문득 쓸데없이 많은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두상자 2개에 한가득 있는 샘플은 대체 어느 세월에 쓸 것이며(안 쓸 거면 차라리 버리던가) 작은 플라스틱 수납장 한가득 화장품은 또 언제 쓸 것이며 종류별로 사둔 저 팩들과 샴푸와 트리트먼트는 또 연제 쓸 것인가.... 난 왜 이렇게 물건의 숲에 둘러싸여 사는가...


다 부질없어졌다. 사용하지 않으니 확실히 구매가 줄었다. 트러블이 나서 구입한 화장품들은 절반도 못썼다. 역시 안정기에 들어서니 피부 컨디션은 확연히 좋아졌다. 1+1으로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가을이 시작하기도 전에 역시 1+1으로 쟁여둔 보습용 화장품도 생각해보면 1개를 50% 세 일할 때까지 기다렸다 사면되는 거였다. 어차피 난 뭐든 좀 과하게 대비하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새로 산 게 올해는 좀 적은 편...인데 저지경이니까... 참 난처한 노릇이었다.


옷도 그랬다. 배가 불러오고. 몸이 무거워지면 입을 수 있는 옷에 한계가 매우 명확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복직을 하는 시점이 된들. 나의 예전 체중과 체격으로 완벽하게 돌아간다는 건 보장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건 다 그때가 돼봐야 안다. 하지만 팔만 겨우 들어갈 원피스와 재킷을 사재 끼는 나를 보면서 7개월이 지나서야 미쳤다는 걸 깨닳았다 옷장 가득 쌓여 있는 옷들을 어쩌지 않고 새 옷을 계속 사들이는 나. 심지어 지금은 입을 수 없는 옷들을 말이다...


임신을 하면 흔히 겪는 호르몬으로 인한 감정 기복이 난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있었다. 온몸으로 겪고 있었고, 그걸 나의 신용카드가 열심히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냉정을 찾고. 욕실과 방을 둘러보고 있다.


사다둔 각종 팩들은 조금씩 바닥을 보이고 있고, 저걸 다 쓰고 나면 괜스레 자잘하게 비싼 화장품을 사들이지 말고 가장 오래 사용하고 있는 마사지 크림 하나와 비타민 팩 하나 정도만 사고 더는 안 살 예정이다. 어차피 선블록 정도 수준의 화장이 전부이니 클렌징도 다양하게 필요 없다. 예전에 사다둔 도브 뷰티 바 정도면 충분히 클렌징이 가능하다. 굳이 잇는 화장품을 버리지는 않겠지만 사다 둔 건 빨리 쓰고 집을 비우고 싶어 졌다.


안 입은 지 3년 된 옷들과 구두, 가방도 정리해야 한다. 옷장이 터질 지경이고, 구두도 이제는 힐은 더 못 신을 거 같다. 결혼식 같은 행사를 제외하고는 힐 안 신은 지 오래고,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면서 하이힐을 신을 리 없다. 무거운 가방도 더는 들지 않는다. 가죽에 집착하던 삶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수남장 한가득 쌓아둔 쇼핑백도 정리해서 버릴 참이다. 어차피 안 쓴다. 언젠가 쓰겠지... 가 제일 위험한 발상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이의 짐이다. 여기저기서 물려받거나 혹은 새로 사들인 아가 물건의 숲이 생기기 시작했다. 옷방을 정리해서 아이 물건을 집어넣기로 하고 옷방을 치우기 시작하니 집이 더 어수선해졌다.


도배도 안 하고 들어온 집이라 아이 물건 넣기 전에 도배도 하고 필요한 이런저런 처리들을 하기로 한 상태라 집이 엉망진창이다. 공사 전까지 쌓여있을 옷과 물건을 보면서 마음의 반성을 하고 있다.


이제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집을 못 치울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에너지를 이제 곧 태어날 아가가 다시 앗아갈 예정이 아닌가. 비장한 마음으로 미니멀리스트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keyword
이전 14화아니야.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