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다

by 김옥진

원래 생리 전에는 늘 가슴 뭉침이 있다.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가슴이 뭉치기 시작했고 수시로 마사지를 해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한 1주일이면 없어져야 할 통증이 2주 넘게 유지되었다.


혹시나 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아랫배가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면서 욱신거렸다. 과한 식탐으로 식도로 음식물이 거꾸로 올라와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먹어댔다. 평소에 위장장애로 섭식량을 매우 신경 써서 조절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호흡에 큰고영도 당황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식탐은 생리 전 증후군이라고 넘길 수 있었지만 쉬이 풀리지 않는 가슴 뭉침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딱 생리 예정일 아침. 큰고영은 하필 외국에 있었고 그 전날 밤에 집 근처 편의점서 사다둔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예정일에서 하루라도 늦어지면 여지없이 꺼내 든 테스트기였고, 한 줄이 흐릿해서 긴가 민가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의 테스트기는 소변이 닿자마자 선명한 두 줄을 만들어냈다. 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 든 테스트기에 줄이 대체 언제 생기나 뚫어져라 봤던 나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두줄이었다.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출근을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그사이 검색을 계속하면서 병원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찾아보았다. 아기집이 보이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듣기에는 이른 시기라는 글이 많이 보였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웃길라고. 그날부터 오른쪽 옆구리 피부 안쪽이 뭐가 꿀렁꿀렁 지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내가 그걸 확인했다는 걸 몸이 아는 건가. 아니면 난 너무 긴장한 건가.


점심시간에 가까운 병원으로 내 닳았다. 테스트기의 상태의 묻는 질문에 사진 보여주니 의사 선생님의 반응은 매우 해맑았다.


축하드려요.
테스트기가 이 정도면 뭐 피검사할 필요도 없네요.
초음파부터 보시죠.



초음파에는 아직 아기집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구분할 수 없는 그 흑백의 화면을 두고 자궁벽이 매우 두꺼워져 있으니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라고. 다음 주에 와서 다시 한번 초음파를 보시자고 했다. 외국에 있는 큰고영에게는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당장 들어올 수도 없고. 사실 당장 들어온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던 아이였다. 나만 빼고. 나는 간절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로 인해 여자의 삶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최소한 5명 이상의 친구와 동료가 아이로 인해 10년 넘는 사회생활을 접었다. 그들이 스스로 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을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10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아는 나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아쉬움이 들곤 했다.


36살에 지금의 남편(큰고영)과 연애를 시작하고 38살에 결혼을 했다. 많은 나이 차이와 종교의 차이 등등을 뛰어넘어 급작스러운 상견례 제안을 받았던 시점은 내 나이 37살 하고도 11월이었다. 아들의 고집은 꺾을 수 없고, 또 그렇게 시간만 보내자니 며느리 될 여자의 몸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리라.


결혼의 전제조건이 '출산'이나 다름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을 결심하고 큰고영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이면 좋겠어. 아들이랑 같이 드론 날리고 놀고 싶어.



왜 그 아들이 너랑 드론을 날리며 놀아줄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왜 그게 아들이어야 하니. 딸은 함께 드론을 날릴 수 없는 거니. 그 애는 네가 낳는 게 아니란다. 수도 없는 물음이 있었지만 사실 죽어도 낳지 않겠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늘 나를 존중하고 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드론을 날리면 함께 놀아줄 '아들'을 바라는 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투명한 내 남자가 참 서운했다. 이 사람과 생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 순간 받아들여야 하는 큰 숙제 중 하나였다.


연애 초반 어린애들이 뒤놀면 혼이 3번은 나간 얼굴로 앉아있던 큰고영은 결혼이 가까워질수록 아기에 대한 관대함이 늘어갔다. 비행기에서 애가 울면 짜증 내던 사람은 어디 가고 "애기 힘들어서 어쨰. 애기 엄마 힘들어 어째"라며 한없이 관대해졌다. 가족모임으로 조카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애들이 너무 예뻐 보여. 아이를 갖고 싶어 졌어'라고 말했다.


정말 아이 낳는 게 좋은 일이라면 지금까지 수많은 기술의 발전에 왜 남자가 아이를 낳는 기적은 포함되지 않았을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아이를 낳는 건 괴로우니 여자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지. 피임약의 부작용이 여전히 존재하는 건 자궁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관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겪는 것이 아니니 부작용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1주일에 한번 교회에서 시부모를 만나는 순간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지나던 어린아이가 예쁘다 소리를 한번 했다가 남의 아이 탐하지 말고 니 아이 낳으라 소리를 들은 이후 교회에서는 절대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멀리 사는 조카를 애지중지 안고 교회를 누비는 시부를 보면서 갑갑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해야 할 기도가 있지? 그렇지?


그 말처럼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말이 없었다. 아마도 엄마에게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점부터가 아니었을까. 시모는 "(아이가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로 아이에 요구를 대신했다. 물론 그조차도 큰고영이 옆에 있을 때는 한 적이 없다. 난 혼자서 그 순간을 알아서 새기고 삭히는 센스 있는 며느리여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도로 생기는 게 아니다. 위장이 눌리고 살이 찌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흉곽이 벌어지고, 발이 부어 신에 발도 안 들어가는 지경을 10달 동안 겪고 수십 시간의 진통을 견뎌야만 완성되는 것이 출산이거늘 모두가 나에게 아이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네가 원하는 건 뭐냐고 묻지 않았다. 엄밀히는 난 대답할 자격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나는 세상에 걸어 다니는 자궁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안부인걸 알지만 내 결혼에 자녀계획이 세트인 건 피곤한 일이었다. 왜 2년이 되도록 애기 소식이 없을까, 스트레스받으면 애 안 생긴다는 걱정도 나에게 스트레스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니 이 낮은 출산율의 시대에 역행하는 매국노 같은 존재로 취급되는 기분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아이를 안 낳으면 속편 하겠다는 내 말에 엄마조차도 내 가슴에 못을 박았다.


누구 집 대 끊을 일 있어?


난 엄마에게 내가 씨받이냐고 악악 댔다. 난 누군가의 대를 이어 주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엄마도 시모와의 만남에서 왜 애들이 인공수정이라도 할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듣더니 "그게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아는데, 딸에게 차마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으라고 등 떠밀 수는 없다"라고 말해버렸다. 그간의 분노가 사라지고 그래도 내편은 엄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 대가는 출산이었다. 아무리 신랑을 잘 케어하고 집안을 가꿔서 열심히 살아도 출산의 신성한 의무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기대하는 그 신성하다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난 기뻐 날뛰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체 차분히 출근을 준비했다. 정신이 혼미했고, 정확한 검진 결과를 빨리 알아야 한다고 조급해했지만 난 사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검진을 받고 돌아 나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서러웠다. 피하고 싶었는데 피할 수 없었고, 피해도 괴롭고 마주해도 힘든 그 현실이 내게 온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 오른쪽 옆구리는 끊임없이 꿀렁거렸고 며칠간 관찰한 결과 눈가가 떨리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 몸에 큰 변화가 생겼으니, 좀 피곤해서 눈가가 떨리는 정도 수준을 뛰어넘는 작은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축하해


나는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축하할 일이었다. 너무나도 원했으니까. 간절히 원했으니까. 나의 심란함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신랑도 나에게 축하를 보냈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건강한 반려자로, 건강한 부모가 되자고 다짐했다.


난 아직도 내가 이걸 원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기도 열심히 해라 소리도 더는 듣고 싶지 않았고, 그 이야기를 엄마가 듣는 것은 더더구나 원하지 않았다. 나만 포기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딩크로 사는 것에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결혼을 진행시킨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흔의 나이에 아이를 안을 준비를 시작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뛰지 않기로 했다. 무거운 것도 함부로 들지 않는다. 내 몸에 벌어진 누군가의 기적이 언젠가 나의 기적이 될 수도 있다. 그 아이에게 미안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과정이 뭐였 건 내가 시작했고 내가 결심한 일이다. 건강한 끝맺음을 향하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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