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도 다들 늘 정신없다는 말을 입에달고 사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 딸 아들 손주들 모두 맨날 그래.
그런데, 그게...그러니까... 달라요.
젊은 시절의 시간들은 금싸라기 같은 거. 그런 아름다운 시간들이 부산하게 흘러가는 거였지.
하지만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건 그저 모래 같은 시간들이에요. 무덤덤하고 아무 의미 없는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 시간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는 건 어찌 보면 너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아서 그런 거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함께 하던 가게를 정리했어요. 슬퍼할 틈도 쉴 틈도 없이 딸아이가아이를 낳아 손주를 돌봐주러 가게되었구..
그리고 아들이 결혼을 해서 또 아이를 낳았네...
이 집 저 집 엄마 도움이 필요하다고 난리인걸 어째. 도와달라면 가서 도와줘야지.
그러다 어느 날, 손주들이 훤칠하니 다들 큰 거 보구서는 내가 알았지. 이 아이들이 이제 내손을 다뗐구나 하구선.
예상대로 곧 한가해지기시작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비니까사람이 좀... 갑자기 더 확 노인네가 된 것 같고.. 갈 때도 된 것 같고... 쓸쓸하고...
사람들이, 세상이 더 이상 나한테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그런 느낌이 들더라구.
누군가가 나한테 기대하는 게 없어지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없어지게 되는 건가 싶어.
난 나에 대해서도 그때부터 뭐든지 다 됐다, 괜찮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한동안 누워만 있었던 것 같애. 입맛도 없고 그러니까 괜히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나 봐요.
우리 집 애들이 “엄마, 건강 챙기셔야죠.”라고 말하면서 혹시 우울증 그런 게 아니냐고 걱정을 하더라구. 그리고 운동 같은 거라도 배워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는 거예요. 겸사겸사 밖에 나가 바람도 쐴 겸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아직 자식들이 나한테 그래도 기대하는 게 하나 남아 있구나 싶더라구요. 뭐겠어요? 건강하길 바라는 거지. 노인네가 나이 들어서 아파봐요. 누가 힘들겠어요? 자식들이 제일 힘들지. 돈도 나가고.
어쩐지 한약이라도 누가 들이부은 듯 입안에 쓴 맛이 나는 거 같으면서도 그래도 이상하게 조금씩 힘이 났어요. 그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지. 어쨌든, 자식들이 바라는 건 그거니까. 부모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살아야지 싶더라구.
우리 딸이 그동안 손주들 키워주느라 고생하셨다면서 용돈을 찔러주더군요.
마침 엄마집 앞에 요가인지 필라..테스인지 뭔지 하는 학원이 있다면서 거기를 한 번 가보래요.
그래서 난 그냥 딸 말만 듣고 집 앞 학원을 한 번 가본 거예요.
우리 손녀 같은 아가씨가 카운터에 있길래 나는 그냥 운동 배우려고 왔다구 했지.
그랬더니 뭐 시스템을 설명해 준다면서 핸드폰에서 앱을 깔라고 그러기에 내가 무슨 영문인가 싶더라구요. 그 무슨 학원 앱을 깔면 거기서 수업도 신청하고 시간표며 뭐며 필요한 정보가 다 나와있대요.
설명을 듣는데, 심장이 좀 벌렁거리고 그러더라구. 핸드폰이야 나도 기본적인 건 사용할 수 있지만... 뭐를 깔아서 거기서 뭘 하라고 하니까.. 내가 복잡한 건 자신이 없더라구요.
다음에 다시 온다고 하고 결국 그냥 나와버렸어요. 부끄러웠던 거 같어. 못하니까. 못하면은 당황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뭐 도와준다 하는 것도 민망하고. 괜히 민폐인 거 같고 그렇잖아. 이제는 그런 모르는 게 있으면 저런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쳐다볼까 봐 그냥 피해버리게 돼요.
집에 오는 길에 괜히 화가 나더군요. 나이 들어서도 사람이 이렇게 쉽게 화가 나요. 아니 나이 들어서 더 화가 잘 나는 거 같기도 하네요. 세상이 왜 이런지. 뭐를 해보려고 해도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 나 같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다가 운동 뭐 별거 있나, 그냥 동네 산책이나 가고, 뒷산에나 슬슬 올라가고 그러면 운동이지 싶더라구요. 따로 돈 쓸 일이 뭐 있나요.
그런데도 마음이 점점 심란해지기만 하더라구요. 이 나이에 뭘 배우겠나, 배워서 뭣에 써먹나 그랬죠.
그러다가 며칠 뒤에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원에 왜 가냐구? 아니 나이 들면 그냥 잔잔하게 여기저기 아파요. 여기 어깻죽지가 요즘 아파서 자주 가는 한의원엘 갔지.
거기 간호사님한테 우리 딸이 뭘 배우라 한다고 이런 얘기를 주책없이 늘어놓았어요. 거기 간호사님이 사람이 아주 좋아요.
내 얘기를 가만 듣더니 글쎄 나한테 요 근처 화실을 한 번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 한의원 다니는 내 나이 또래 환자 중에서도 거길로 그림을 배우러 가는 사람이 있다나. 그림 배우러 다니면서 어깨 아프다고 얼마 전에도 병원에 왔다구 하더라구.그 얘길 듣고 나를 더 환자 만들라고 그러는 거? 하고 농담도 했지.
그림?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인데 갑자기 침침한 눈이 확 밝아지는 거 같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어릴 적에 공부도 잘했고 그림도 참 잘 그렸는데.. 뭐 그리고 그냥 살았지. 그때, 여자가 그림을 잘 그려서 뭘 어쨌겠어요. 대학도 못 갔는데. 그냥 그런 걸랑 잊어버리고 결혼하고 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쭉 살았지
... 아니.. 어쨌든 그렇게 그 화실엘 가게 된 거예요.
화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 그림들이 걸려있기도 하고 바닥에 여기저기 놓여있기도 한데 그냥 그걸 보니까 내 마음이 갑자기 좋더라구요. 그래서 나 여기 다닌다고, 언제부터 오면 되냐구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내일부터 나와도 된다고 미술 재료는 다 준비되어 있고 나는 앞치마만 준비해 오면 된다구 그러시더라구. 앞치마야 뭐 집에 널린 게 앞치마지 뭐.
“여긴 뭐 앱인가 그런걸루 시간 예약하고 그런 거 아니죠?”라고 물어보니까, 거기 선생님이 웃으면서 아니라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나오면 된대. 오는날이 바뀔 거 같으면 미리 전화나 문자 달라구 하시구. 어휴 얼마나 편하고 좋아요?
그리고 내가 그날부터 학생이 되었어요.
글쎄 내가 한 오십 년도 넘어서 다시 학생이 돼 본 거예요. 선생님이 있다는 것도 좋고, 내가 학생이라는 것도 참 좋더라구.
이상하게, 이건 모른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더라구요. 누가 뭐라 그러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런가?누가 이 나이에 그림 그리는 법을 잘 모른다고 나한테 무식하다고 하겠어요?
그리고 여기서 내가 동무도 사귀었잖아. 그 여기 다닌다는 그이. 내 나이 또래 친구. 우리는 같이 그림도 배우러 다니고,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다니고 그랬어요.
둘이 같이 키오스크인가 그걸로 여기 카페에서 커피 주문도 처음 해봤어요. 둘이 해보니까 그것도 할만하더라구. 그렇게 거의 일 년이 다돼 가요. 그림 배우러 다닌 지가.
출처:PIXABAY
이 학원은 일 년에 한 번 학생들 그림을 모아서 여기 카페에서 작은 전시회를 연대요. 이제 2주 남았잖아. 그래서 내가 요즘 아주 바빠요. 그때까지 내 그림을 완성해야 하거든.
그런데 우리 화실 선생님이, 여기 무슨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는 모임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냥 뭐 어려운 것도 아니라구 하고 여기카페에서 한대. 그래서 내가 한 번 와봤어요. 내가 와도 되는 덴가 잘 몰랐는데 저기 모임장님이 와도 된대서 와본 거예요.
내가 온 김에 요기 전시회 안내문을 주고 갈게요. 혹시 시간이 나면 지나가다 와서 전시회 구경도 하고 그래요. 무료예요.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