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담 Aug 10. 2021

미시간의 겨울, 혼자 먹는 김치찌개

미국 중서부(Midwest)의 겨울은 지루할 만큼 길고 또 지독하게 춥다. 캘리포니아에서도 무려 다섯 번에 걸쳐 면허 테스트를 겨우 통과하고, LA 고속도로는 겁이 나서 차마 엄두도 못 냈었던 나는 미시간 고속도로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겨울이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연일 무섭게 펑펑 쏟아지는 눈이 다음날에는 미끄러운 회색 빙판으로 변하기 때문에 출퇴근길을 운전하는 내 얼굴도 잿빛이 되곤 했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져서 퇴근 시간인 5시를 조금만 넘겨도 창 밖은 금세 어두워진다. 가뜩이나 밤눈이 좋지 않아 해가 진 뒤의 도로는 더 긴장되기 마련이다. 겨우 15분 남짓한 퇴근길을 무사히 완주하고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허기가 썰물처럼 밀려온다. 오늘은 뭐 먹지. 머릿속으로 재빨리 냉장고에 뭐가 남았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샤워를 하는 동안 물을 끓이고 잽싸게 준비해서 먹을 수 있는 오늘의 저녁 메뉴는 바로 김치찌개.

© eommina, 출처 Pixabay

손만 씻고 김치를 국대접에 가득 담아 가위로 서걱서걱 자른다. 밖은 어느새 캄캄해지고 부엌의 노란 알조명이 빨갛게 조각난 김치를 비춘다. 고춧가루와 멸치 액젓을 조금 넣고 기름을 두른 냄비에 살짝 볶아주면 칼칼한 김치 볶음 냄새가 온 주방을 채운다. 아참, 밥! 제일 중요한 밥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얼른 쌀 두어 컵을 씻쳐 밥솥에 앉힌다. 남은 쌀뜨물을 김치찌개에 활용하면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스팸과 양파를 대충 잘라 와르르 쏟아 넣고 약불로 줄인 뒤 급하게 샤워를 하러 간다.


뜨거운 샤워를 마치고 나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킨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의 짭조름한 냄새를 안주삼아 얼음장처럼 서늘한 맥주 한 모금을 입안에 물고 얼른 상을 차린다. 밖은 매섭게 춥지만 그래도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 먹을 수 있어 감사하다고 기도를 한다. 문득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녁밥에 반주(飯酒)를 즐겨 드시던 아빠 생각이 났다. 그때는 쌀밥에 맥주가 영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반주란 밥을 먹을 때 함께 마시는 술이다. 주로 저녁상에 반주가 따르는데, 반주는 식사할 때 식사 전에 술을 한두 잔을 마셔서 피로를 풀고 식욕을 돋우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가정에서 술을 빚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반주(飯酒))]


"아빠, 맥주는 치킨이나 피자, 튀김 같은 안주랑 먹어야 맛있지! 그리고 친구들이랑 짠 하는 맛도 없이 혼자 무슨 재미야?"라고 물으면 아빠는 늘 밥이랑 같이 한 잔 하는 건 괜찮다고 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빠가 괜찮은 안주도 없이 저녁밥에 술 마시는 게 못마땅했던 고작 스무 살의 나는 괜히 트집 가득한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 오기 전에 같이 '짠' 좀 더 해드리고 올걸. 밥 먹고 아빠한테 영상 통화를 걸까 하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괜히 울적해 보여서 또 나중으로 미루고 만다.


김치찌개와 맥주 조합이 너무 맛있어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빈 밥그릇을 손에 들고 터덜터덜 주방에 밥을 더 푸러 가는데 미시간의 밤이 갑자기 너무 고요해서 숨이 막힌다. 찌개가 벌써 식은 것 같다. 오늘따라 TV 소리와 강아지 짖는 소리 그리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복닥복닥한 우리 집 101동 303호가 그립다.

이전 01화 소고기 미역국과 맨해튼 비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