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냄새가 그리운 날
엄마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여덟 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꼬맹이였다. 길음동 달동네 꼭대기에서 엄마가 운영하는 영-헤어 미용실 뒤 켠에 딸린 방 하나가 우리 집 거실 겸 안방, 그리고 내가 문방구에서 사 온 지우개를 가득 모으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플라스틱 4단 서랍장이 있는 내 방이었다.
4월 봄날의 어느 늦은 저녁, 그 작은 방에서 엄마는 우리 동네 언덕만큼 가파르게 솟은 배를 부여잡고 갑자기 미역국을 끓여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반찬도 없이 미역국에 밥을 말아 드시고 계시는 엄마에게 왜 또 저녁을 드시냐고 물었다. 엄마는 막내를 낳으려면 힘을 많이 써야 해서 밥을 든든히 먹고 가야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진한 소고기 미역국 냄새, 엄마의 부른 배를 감싸던 빛바랜 감색 임부 원피스 그리고 엄마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신 뒤 홀로 남겨져 전화를 기다리다 잠든 그날 밤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막내가 태어난 이후로도 엄마는 한 달 넘게 미역국만 드셨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맨해튼 비치에서 5분만 차를 타고 달리면 나오는 흑인들과 멕시코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 가디나(Gardena). 거기서 가장 저렴한 원베드룸을 구했는데 한 달 렌트비만 700달러를 내야 했다. 빠듯한 인턴 월급에 배달이나 외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인 슈퍼마켓 H-Mart에 가면 커다란 미역 한 봉지를 4.99 달러에 살 수 있다. 마른미역을 한 움큼 부숴서 찬 물에 담가 두면 바다 괴물처럼 금세 불어난다. 미역 한 봉지면 몇 달은 질리도록 미역국을 먹을 수 있다.
유학 경험도 없이 덜컥 미국에 와서 현지인 팀원들과 같이 일을 하려니 쉽지가 않다. 직장 동료들의 농담 한 마디도 영어 듣기 평가처럼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간간히 컨디션이 좋은 날은 농담도, 회의도 그럭저럭 잘 풀린다. 어떤 날은 부족한 영어와 그걸 애써 감추기 위한 억지 미소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된다. 그런 날은 저녁밥으로 미역국을 끓인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어 바퀴 두르고 물에 불린 미역과 다진 마늘, 소고기를 달달 볶는다. 물을 붓고 냄비 안의 작은 바다가 끓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그러면 맨해튼 비치에서도 그립고 익숙한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면 꼭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음악 소리와 엄마의 흥얼거림이 들린다. 남편과 세 딸들의 생일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집 안을 잔뜩 채우던 진한 미역국 냄새. 미역국을 끓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끌미끌한 미역국은 애써 씹지 않아도 후루룩 잘 넘어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에 밥을 가득 말고 퉁퉁 불은 밥알과 미역 그리고 그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가득 떠서 삼키면 목구멍 가득했던 타지 생활의 서러움이 조금은 위로받는 것 같다. 뽀얗게 기름이 붙은 소고기 몇 점을 집어먹고 속이 느글느글해질 때쯤 한인 마트에서 사 온, 아껴 먹다가 너무 쉬어 버린 김치 한 점 씹으면 몇 시간 실컷 운 것처럼 속이 개운해진다. 미역국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으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 이제야 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