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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로운 윤슬 Sep 07. 2018

결핍은 성공의 열쇠

다섯번째 조각: 촌년의 파란만장한 상경기

웹디자이너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고 싶은 회사를 정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유명한 웹에이전시를 찾아보았다.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정했다.

회사문화가 좋은 것 같은, 그런 회사였다.

그 회사의 채용공고를 계속 찾아보았으나 5년차 이상 경력만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업계에서 이름만 말하면 알만큼 유명한 곳이니 신입은 바라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취업준비를 한창하고 있던 대학교 마지막학기에 취업포털을 헤매다 '웹 퍼블리셔' 취업대비과정을 알게 되었다. 협회 웹사이트를 둘러보다 내가 가고 싶던 회사의 로고가 눈에 띄였다. 그 교육기관과 내가 가고 싶은 회사는 서로 협력관계에 있었다.


'이거다!'


눈이 번쩍 뜨인 나는, 무조건 그곳에서 교육받아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간절한 마음에 교육 시작하기 5개월 전부터 접수를 미리 해두었다.

몇 개월이 흐르고 연락이 와서 교육 면접날이 잡혔다. 수요일 오전 11시.


면접에 붙어야한다는 간절함에 교수님께 양해를 구해 수업을 빠지고 면접 전날 숙소를 예약하고 성남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저녁을 사기 위해 이마트를 들려 초밥을 사담았다.

화장품을 사러가서 점원에게 아이라이너 어디있냐고 물어보는데 점원이 알아듣지 못했다.

사투리가 심해서 못 알아들은 건가 싶어 잔뜩 주눅 들어버렸다.


'이런데서 어떻게 생활을 하란거야'

난생 처음으로 타지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두려움이 커졌다.



다음 날, 면접장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까져서 피가 났다. 

부랴부랴 반창고를 사러갔다.

겨우 편의점을 찾았다.


"여기 반창고있어요?"

나름 사투리를 죽여가며 물어봤다.

"네?" 

오늘도 서울사람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반.창.고. 있어요?"

점원은 동공이 흔들리더니 

"반창꼬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하면서 반창고 있는 곳에 손짓을 한다.

급하게 사들고 나와 화장실로 가서 '아.. 서울에서는 반.창.꼬.라고 하구나' 되뇌면서 밴드를 붙였다.


짐이 많아서 지하도 보관함을 찾아 짐을 넣어두고 서둘러 면접장으로 향했다.


채용면접이라도 되는양 잔뜩 긴장했는데, 전혀 무겁지 않은 면접이었다.

결격사유가 있는지, 교육을 충분히 마칠 수 있을만큼 신체건강한지, 교육을 수료할 의지가 있는지 정도 간단하게 확인하는 자리였다.

전날 지방에서 올라와서 숙소에서 자고 왔다니 깜짝 놀라는 담당선생님..

굳이 그렇게 신경써서 올 필요가 없었구나 맥이 탁 풀렸지만 덕분에 구경 잘 했다며 스스로 위안삼았다.



면접 합격 후, 7월 말에 기숙사로 지정되어있는 고시텔로 이사를 했다.

좁은 방이라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불 하나, 컴퓨터, 세면도구, 화장품 이렇게 단출하게 챙겨 들어갔다.



집 밖에 보내는 딸이 마음에 걸리시는지 아버지는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이런저런 당부를 끊임없이 하셨다.

모란시장을 한 바퀴돌면서 필요한 반찬가지를 사고

점심을 같이먹고 근처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나서야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셨다.


하필이면 헤어질 때 비가 왔다.

번잡한 모란역 근처에 차 댈 곳이 마땅이 없어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쥐어주시는 우산을 들고 고시텔로 들어가는데 눈물이 주룩났다.


좁디좁은 고시텔 방 안으로 들어가니 '아 이제 진짜 혼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내게 그렇게 큰 존재였나 생각이 들며 외로움이 엄습해왔다.






우물 안의 개구리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붙어서 교육을 들었다.

내가 들었던 교육은 일정이 빠듯했던 수업이라 더욱 빡세게 돌아갔다.


코딩 공부도 했고, 컴퓨터 학원을 전전하며 웹디자인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명 남짓되는 수강생들은 웹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직에 있다가 업무역량을 높이기 위해서 퇴사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다들 수준급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취업을 목표로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열정이 대단했다.

그런 열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그 분은 바로 담당 선생님.


선생님은 수업 준비를 위해 야근은 물론 주말출근까지 하시면서 열심히 수업자료를 준비하셨고, 학생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셨다.

여태 내가 알던 웹디자인은 웹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프로그래밍 동아리에서 코딩공부를 1년동안 하고 왔으니 이정도쯤이야 하고 얕잡아봤는데, 수업내용도 따라가지 못해 버벅거렸다.


수업 첫 날,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끝낸 학생들은 집에 가는데 나는 과제를 마치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 옆으로 오셔서 차근차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흘렀다.

하루종일 열등감으로 쌓여있던 마음이 탁 풀렸다. 

집이 너무 그립고,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수업을 마치고 또 그 컴컴한 고시텔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좁아터진 집,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는 숙소, 혼자 사는 것에다가 주변 사람들의 말투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외로움을 겨우 밀어내며 잠에 들 때쯤 몸을 뒤척이면 침대 옆에 있는 화장실과 부딪히기 일쑤였다.

화장실도 좁아서 세수를 할 때마다 선반에 부딪혔고 샤워를 할 때면 몸 움직일 공간도 없어 가만히 서서 씻어야 했다.

책상에 물건을 살짝 옆으로 치워두고 작은 냉장고 안에서 엄마가 해주신 반찬을 꺼내서 저녁을 먹을 때면 서글펐다.

밥을 먹다가 벽에 붙어있는 가족사진을 보니 또 눈물이 흘렀다.

보고싶은 엄마 아빠를 사진으로 보니 가슴이 아렸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부모님 모습을 보니 더욱 보고싶어져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문득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교육끝나면 집에가서 멍하니 있지말고 책 읽으면서 시간 알차게 보내. 그런 시간이 정말 중요한 시간이야."

어머니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녔다.

굳게 마음 먹고, 고시텔 좁은 책상을 차지하고 있던 TV를 떼어내어 벽장 위에 올려두고 심심하면 책을 꺼내 읽었다.


교육받으면서 교육생들 하나둘씩 친해지긴했지만 다들 뭔가 데면데면한 면이 있었다.

그러다 첫번째 프로젝트가 끝나 회식을 하게 되고 그 때부터 슬슬 편이 갈리기 시작했다.

그저 취업만이 하나의 목표였던 나는, 사춘기 소녀처럼 무리를 지어 노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듣기 싫어 쉬는 시간이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책만 읽었다.


마음붙일 사람도, 마음 붙일 곳도 없는 나는 금요일만 되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고향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늦은 시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항상 마중나와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반가웠다. 이렇게 애틋할 수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토,일요일은 어찌나 그렇게 순식간에 흘러가는지.

일요일 저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창 밖으로 손 흔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루 빨리 취업을 해서 이 생활을 끝내야겠다는 다짐이 점점 커지는 순간들이었다.



고시텔 책상. 1차 프로젝트 때문에 분주하던 때






고슴도치, 지봉이


성남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성남에 그나마 정을 붙이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고슴도치 '지봉이'

본가에서 키우던 고슴도치를 고시텔 생활하면서 데리고 왔다. 

혹시나 밥이 모자라서 굶지 않았을까, 추워서 얼어죽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성남 터미널에 내리면 서둘러서 고시텔로 향했다.

고시텔에 도착하면 그 동안의 걱정이 무색할만큼 지봉이는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들어가서 불을 켜면 후다닥 숨어버리기 바빴다.


그 어느때보다 컴컴한 고시텔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활발해보이는 지봉이.

집에 들어가서 적적할 때면 지봉이를 밖에 꺼내놓고 쓰다듬어줬다.

처음에는 가시만 세우고 밤송이가 되어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던 지봉이를 쓰다듬어주니 가시를 조금씩 눕혔다.

옷소매를 물고 장난치는 모습을 볼 때면 너무 신기했다.

그렇게도 까칠하던 지봉이는 내 손 위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하루의 고단함을 녹여주었다.

지봉이는 외로웠던 타지에서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

지봉이와의 첫 만남은 동생이 수능시험을 치고 나서였다.

동생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까만 가시의 고슴도치 한 마리와 베이지색 가시의 고슴도치가 박스 안에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슴도치 부부는 새끼 여섯마리를 낳았고, 암컷을 자꾸만 괴롭히는 수컷은 다른 곳으로 분양보냈다.

새끼들과 남겨진 어미 고슴도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날 부모님께서 용지봉에 다녀오셨다고 말씀하시는게 귀에 꽂혔다.

'용지봉? 지봉? 지봉이 괜찮겠는데?' 그렇게 어미 고슴도치 이름은 지봉이로 정해졌다. 


소심했던 지봉이는 왠만해서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좁은 고시텔에 고슴도치 집을 둘 공간도 마땅하지 않아 키우지 않으려했는데 동생이 재수를 할 때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외로움을 제대로 겪었다면서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적극 추천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던 고슴도치 집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작은 리빙박스에 지봉이 거처를 옮겼다.

쳇바퀴가 커서 뚜겅도 덮지 못했다.

처음에는 지봉이가 도망칠까봐 화장실 안에 집을 넣어두곤했는데 소심한 지봉이는 탈출 한 번하지 않고 얌전하게 잘 지냈다. 고시텔에서 같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룸메이트였다. 



함께한지 4년정도 흐른 뒤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봉이.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고슴도치 용품을 정리하면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작은 동물이지만, 정말 많은 추억과 위로를 주고 간 지봉이.

그곳에서는 편하게 지내기를...



까칠한 지봉이







진심은 통하는 법


교육생들과 딱히 그렇다할 교류가 없었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한 언니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 언니는 가끔 내 방 문을 두드리고 음식을 건네주고 갔다. 

동생들은 내 방에 대뜸 들어와 침대에 앉아서 본인 하소연만 잔뜩하다가 가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언니는 그냥 어느 날은 초콜릿 잔뜩 주고, 어느 날은 과일이 맛있다며 과일을 전해주고 가곤했다.

무리지어다니는 걸 보기 좋지 않게여긴 언니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는 내가 눈에 밟혔나보다.


어느 날 언니가 치킨을 혼자 먹었다기에 다음에는 같이 먹자고 그랬더니, 며칠 뒤 언니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 혼자 바베큐 치킨 한 마리를 사와서 허겁지겁 먹고 있었는데 딱 들켰다.

언니는 "같이 치킨사러가려고 했는데 벌써 먹고 있네"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난 먹던 치킨을 곱게 싸두고 언니와 산책하러 나왔다.

고시텔이 있는 유흥가 거리를 벗어나니 전통시장이 나왔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런 길도 다 있냐면서 신기해하는 나에게 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저 멀리서 옛날통닭을 팔고 있는 가게가 보였다. 언니는 여기서 샀다고 했다. 꽤나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날부터 그 가게 단골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세번 요가를 가고, 요가 가지 않는 날이면 언니와 근처에서 산책을 즐기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교육생들 중에서 디자인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언니는 코딩을 힘들어했다.

결국 언니는 교육 수료 전에 중도포기를 했다.

그간 힘들어한 언니를 보면서 잘 한 선택이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언니가 떠나고 한동안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교육생들은 다들 지쳐갔다.

프로젝트에 쫓기면서 서로 상처되는 말도 쉽게 했으며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난 오른쪽 손목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고, 이 직업을 가지고 평생 돈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같이 점심 먹는 동생에게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육받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굳이 이 직업을 가져야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동생은 선생님께 상담받기를 권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선생님에게 상담받으러갔다.

선생님께 고민을 말하기도 전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너무 힘들다고,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힘들고, 주기적으로 아픈 손목도 걱정되고,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하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디자인 실력도 없는데 앞으로 이걸로 밥벌어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두서없이 힘든 점을 쏟아내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시던 선생님은 "집에서 아이 키우면서 일하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했다"는 내 말을 들으시고

"여자가 아이키우면서 일하기에 웹디자인만한게 없다면서, 그게 꿈이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다"고 말씀해주셨다.


선생님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퉁퉁부은 눈으로 마음 다 잡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옆에서 걱정되는 눈으로 쳐다보는 동생들이 있어서 조금 부끄럽긴했지만 울고나니 속이 후련했다.

언제든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신 선생님은 아직도 나에게 든든한 후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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