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소로와 황금, 프라하의 밤

프라하성( 황금소로- 성 비투스 대성당- 카를교)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조각을 만지면서 호그와트 레고를 사달라고 빌었다. 정말 사주실까?


9살 일기

강아지 조각이 귀여웠다. 강아지가 갖고 싶다.




내일 있을 투어의 모임 장소를 확인한 후,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샀다. 일단 숙소에 들어가 장 본 물건들을 두고 나와 다시 길을 나섰다. 프라하 성을 들르기 위함이었다. 내일 투어에서는 프라하 성의 겉만 둘러볼 예정이었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오늘 둘러보기로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목적으로 지어진 여러 형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프라하 성은 사실상 작은 도시였다. 통치를 위한 궁이 있었고, 종교를 위한 교회가 있었으며, 물건을 파는 상점과 주거를 위한 주택이 있었다. 특히 프라하 성의 황금소로에 늘어선 건물들은 원래 이곳을 지키던 포병들의 막사를 재활용해서 만든 주택 혹은 상점이었다. 하지만 이 협소한 건물들은 임대가 잘 되지 않아 빈 집이 많아졌고, 급기야는 빈 집에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빈민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금소로'라는 이름은 마법으로 황금을 만들기 위해 연구했던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았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빈민들이 모여 살던 시기, 하수시설이 없던 이곳 거리 곳곳에 흐르던 노란 빛깔의 오줌이 햇볕에 빛나던 장면에서 기원했다는 등 몇 가지 설이 있다. 어쨌든 '황금소로'에 실제의 '황금'이 존재했던 시절은 없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오줌설이 재미있고 믿음이 갔다.


황금소로는 본래 유료 입장이지만 오후 5시 이후로는 무료 개방으로 바뀌었다. 우리 역시 일부러 5시에 맞추어 입장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좁은 골목이 무료입장한 관광객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모두들 어딘가에 꼭 꼭 숨어서 5시까지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소설 '변신'의 작가로 유명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또 다른 작품 '성(城)'을 집필했다는 2층 가옥이 인상 깊었다.


'소로(小路)'라는 이름처럼 황금소로의 골목길은 좁았다.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한 아가씨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가 아이들의 사진만 찍어 주고 있던 것이 안쓰러웠는지 우리 삼부자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제안을 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혹시 사진 촬영을 핑계로 카메라나 휴대폰을 가져가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웃음에 불신을 거두고 카메라를 건넸다. 촬영을 마치고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돌려주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염치불구하고 아이들과의 촬영도 부탁했다. 아이들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선한 얼굴이 셔터를 누르는 의심 많은 남자의 손가락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DSC06957.JPG 선한 미소의 그녀와 비투스 대성당 앞에서


수십만 개의 유리조각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 성 비투스 대성당의 출입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입장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회다. 아직 왕이 되기 전 공작의 신분이었던 바츨라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물인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성당을 지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 성당은 14세기 무렵 카를 4세에 의해 대규모로 개축되었다. 하지만 공사는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었고 600년 동안 미완성의 모습으로 내려오다가 192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이 되었다.


중세시대 성당의 유리창을 장식했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화와 마찬가지로 글을 모르는 서민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알폰소 무하가 작업한 이곳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의 그것처럼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광고의 역할까지 했다는 점에서 다른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랐다. 은행에게서 성당 개축 비용을 계속적으로 후원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무하의 작품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고 말았다. 일단 무하의 작품을 만나는 일은 내일이나 모레 무하 박물관을 방문하는 때로 미루기로 했다.




프라하성 구경을 마치고 내려왔다.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띄어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벽을 장식한 세계지도에 표시된 '서울'이라는 영문표기가 신기했다. 알고 보니 서울에도 지점이 존재하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가게였다. 프라하에만 있는 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우리나라에도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괜히 속은 느낌이 났다. 먼 길을 고생 고생해서 걸어왔는데 알고 보니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 느낌이랄까?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만 오를 수 있다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연들이 카를교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의 그림과 연주 등을 가만히 지켜봤지만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지 않은 탓인지 그 작품과 공연의 질이 뛰어난 지 어떤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다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성 네포무츠크의 동상 아래에서 아이들과 나는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 강아지'와 '떨어지는 성 네포무츠크'의 부조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었다.


"뭐라고 빌었어?"

"말 안 할래요."

"혁우는?"

"나도요."


혁우는 형을 곧잘 따라 했다. 혁우한테 먼저 물을 걸 그랬다. 사실 물으나마나 아이들은 장난감이나 레고 같은 것을 빌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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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성 네포무츠크를 만지며 장난감 소원을 빈 형제들

프라하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인 네포무츠크의 죽음에 대해선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해 죽었다는 설과 왕의 새로운 정책에 반대하다가 고문을 받아 죽었다는 설 등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그나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죽임을 당한 뒤 블타바 강에 던져졌다는 사실이다. 이후 강에서 건져진 그의 시신은 성 비투스의 팔이 보관되어 있는 프라하성의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저녁식사로 구글에 안내된 맛집을 찾아 꼴라뇨와 타타르 스테이크를 먹었다. 꼴라뇨는 양념에 저민 돼지 족발 부위를 오븐으로 구운 요리였다. 겉을 바삭바삭하고 속은 매우 부드러워 우리네 족발 요리와는 또 다른 식감과 맛이 있었다. 저 유명한 칭기즈칸이 유럽에 전파한 요리 '타타르 스테이크'는 우리 음식 '육회'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한다. 우리네 육회처럼 잘 비빈 후에 빵 위에 올려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먹는 법을 모른 나는 섞지도 않은 채, 소스 따로, 육회 따로, 빵 따로, 각각 먹어 버려 소고기의 비린 맛만 잔뜩 맛보고 말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식도락에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식당을 나섰다. 이미 사방에는 흑맥주의 빛깔 같은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프라하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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