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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May 07. 2018

실망스러운 수정궁, 아쉬운 레알 궁전

부엔 레티로 공원 (수정궁, 벨라스케스 궁전)- 마드리드 왕궁

실망스러운 수정궁, 아쉬운 레알 궁전     

부엔 레티로 공원 (수정궁, 벨라스케스 궁전)- 마드리드 왕궁     


11살 일기

오늘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나 혼자 물건을 샀다. 아빠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것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쉽고 재미있었다. 다음에도 내가 사야겠다.    

 

9살 일기

형은 대단하다. 영어도 아빠만큼 잘하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형 말을 더 잘 들어야겠다. 참, 수정궁은 정말 실망이었다. 더 크고 멋있을 줄 알았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대충대충이 어렵다.


마드리드에 묵는 마지막 날이다. 지난번에 관람 못했던 수정궁과 마드리드 왕궁을 보러 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일 아침 기차를 타지 못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아토차역에 먼저 들렀다. 스마트폰으로 예약해 놓은 세비야 행 기차표를 발권하기 위함이었다. 발권기에 예약번호를 입력하니 바로 승차권이 출력되었다. 굳이 오늘 발품을 안 팔고 내일 아침에 해도 충분했을 일이었던 것 같아 공연히 시간을 허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 다닐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대충 처리했던 일들조차 아이들과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두 번 세 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단골 식당 맥도널드에서 요기를 하고 지난번에 못 들렀던 수정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조금 걷다 보니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이 나왔다. ‘게르니카’라는 작품은 프랑코 장군의 독재 시절 나치의 폭격을 당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도시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 욕심이 나긴 했지만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냥 전체적인 느낌만이라도 맛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피카소의 그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다른 이유였다.


며칠 전에 거북선 놀이를 했던 부엔 레티로 공원을 다시 들렀다. 평일 한 낮인데도 스페인 시민들이 공원 곳곳에서 자유롭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오솔길 끝에서 수정궁이 보석같이 투명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정궁은 혁우가 만화책 “쿠키 런, 마드리드에서 보물찾기”에서 보고는 한국에서부터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수정궁을 마주한 혁우의 반응은 의외로 심드렁했다. 아마도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던 까닭인 듯 했다. 혁우의 실망 어린 얼굴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처음 보았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안개 자욱한 날씨에 마주한 거대한 금문교는 내가 그 많은 영화 속에서 보고 상상했던 그것만큼 웅장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현실은 상상을 넘어설 수 없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체가 유리로 덮여있던 수정궁

 

수정궁은 이름과 달리 왕실이 사용했던 궁전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바라본 수정궁은 유리로 된 외장재 때문에 커다란 온실이나 식물원 같이 느껴졌다. 실제로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들여온 희귀한 식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여름밤에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는 등 문화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궁 앞의 아담한 연못과 얼음 같이 투명한 수정궁이 클래식 음악과 어우러지는 장면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쫒기에 충분할 듯싶었다.

수정궁 앞 연못

 



광물 전시관이었던 본래의 용도에서 지금은 미술 전시관으로 사용된다는 붉은색의 벨라스케스 궁전에 들렀다. 건물 앞 동상 주위에서 놀던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추로스를 사달라고 했다. 마침 맞은편에 간이식당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동전을 쥐어주고는 직접 사 먹으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자기들끼리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빠가 사주면 안 돼요?”

“밥은 아빠가 사주겠지만 그 외의 군것질은 이제부터 너희들 스스로 사야 해.”  

   

물건을 잘못 사 오거나 거스름돈을 덜 받을까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때라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현지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둘이 서로에게 미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가 해.”

“형이 해.”

“얘들아, 안 먹을 거면 아빠한테 돈 돌려주고.”

“아. 알았어요. 너 내가 사 오면 못 먹을 줄 알아.”  

   

일우가 혁우를 원망하듯 쳐다보더니 그대로 가게로 달려갔다. 혁우 역시 마음이 불편한지 바로 형을 따라갔다. 일우가 가게에 붙은 추로스 그림을 가리키고는 손가락 하나를 가게 점원에게 보여주는 게 보였다. 점원이 웃으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다행히 상품 구입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한 손에 커다란 추로스를 들고 나타난 형제들은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었다.

    

“거봐 어렵지 않지?”

“네.”

“형 나도 한입만.”

“싫어. 넌 안 갔잖아.”  

   

형제들은 잠시 옥신각신하다가 금세 의좋은 형제가 되어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츄로스 구입 중인 형제들

마드리드 왕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였다. 인터넷에 나온 무료입장 시간이 6시였으므로 아직 한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기에 바로 줄에 붙어섰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입장시간인 6시도 안 되었는데 계속 줄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결국 앞에서부터 줄이 빠지더니 내 앞사람이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입구를 지키는 직원에게 여섯 시에 입장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이제 곧 6시면 폐관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자꾸 줄을 서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게시판에 붙은 안내문을 보니 10월에서 3월은 여섯 시 폐관으로 무료입장시간은 네 시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무료 입장객들은 이미 4시에 모두 입장해 버린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그냥 입장료를 내고 볼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일 아침 마드리드를 떠나야 했기에 마드리드 왕궁은 이제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친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얘들아 마드리드 궁전은 다음에 너희들 힘으로 와야겠다.”

“그러죠. 뭐.”     


무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반응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왕궁을 구경 못해 아쉬운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굳게 닫힌 레알 궁전 철문에 기대앉아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비틀스의 “HEY JUDE"를 감상했다. 저녁 무렵의 따사로운 햇살이 광장에 놓인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상황이 즐거운지 경찰 도둑 놀이를 하며 시끌벅적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 때 방어를 위한 요새였던 왕궁 광장 너머로 해 지는 마드리드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안녕, 마드리드 왕궁


아이들의 영어 사용

  

 여행기를 읽다 보면 가끔 아이들에게 그동안 배웠던 영어를 써보라며 시키는 장면들을 만날 때가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짧은 여행기간 동안이라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사용하게 해서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 역시 큰 아이가 1년 정도 영어학원에 다녔던 까닭에 영어를 써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사실 어른들조차 입이 얼어붙는데 그걸 아이들에게 해보라고 강요하는 건 어른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물론 자꾸 해보는 가운데 익숙해질 수도 있겠지만 자칫 외국인과의 대화 경험이 상처로 남을 위험도 있기에 나는 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우선 아이들에게 내가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어가 어려운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었다. 내 영어는 아주 간단한 생존 영어였고 실제로 일우는 그걸 보면서 외국인과의 대화가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빠가 말하는 웬만한 문장들이 자신도 거의 알고 있는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일부러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인사를 하곤 했는데 아이들 역시 나를 따라 인사를 하면서 외국인들과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어른인 내가 인사를 할 때는 그냥 평범하게 대꾸하던 외국인들도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묻곤 했던 까닭이었다. 물론 이 방법은 영어를 떠나 인간관계 형성에 중요한 인사 습관을 길러준다는데 있어서도 아주 좋다.


또 하나 추천하는 방법은 아이들이 군것질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직접 사주지 말고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어 사 오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이들이 가게에 가서 직접 산다면 용기와 경험이 느는 것이고 혹시라도 사지 않겠다면 돈이 굳는다는 어른답지 못한 얄팍한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굳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서로에게 미루던 아이들은 익숙해지자 물건 파는 직원에게 '잘생겼다', '예쁘다'는 농담을 해가며 덤까지 얻어왔다. 물론 가끔은 마음 나쁜 상인에게 걸려 바가지를 쓰기도 했지만 ‘물건 직접 사기 미션’은 아이들에게 경험과 자신감이라는 훌륭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랬던 것은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는 잘할 수도 못 할 수도 있는 재능 중 하나이지만 경험을 통해 얻은 용기와 자신감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갖춰야 하는 덕목이었다. 이 세상 어떤 곳에서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배운다면 그것 하나로도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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