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낄 때마다 한라 수목원을 찾는다.이곳에 와서 이름조차 모를 식물들의 풀내음을 맡고 곤충들과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일상을 떠난 새로운 세상에 도달한다. 그 새로운 세상은 평소 여행을 꿈꾸던 그리스의 산토리니이기도 하고 잉카제국의 마추픽추가 있는 안데스 산맥이기도 하다.
게다가 일상처럼 내 발을 옥죄고 있는 신발까지 벗어던지면 나는 어느새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거스르며 걷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발 한발 걷다 보면 나는 그 옛날 온종일 맨발로 걸으며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나의 조상들처럼 단순하고 명료해진다. 다음 주에 있을 미팅이나 내일 보내야 할 송장 메일 따위는 단지 다음 끼니만을 생각하며 열매와 과일을 찾아 헤매던 맨발의 조상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한라수목원은 맨발로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오로지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장소인 까닭에 보행로에는 위험한 유리조각은 물론 그 흔한 쓰레기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신발을 벗는 걸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신발은 일상의 위험에서 우리의 발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해주기도 하는 물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고 있는 족쇄이기도 하다. 신발은 땅과 나의 직접적인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며내 발등과 복숭아뼈들이 숨을 쉬는 것을 차단하는 마스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이러한 장벽을 넘어 대자연과 직접 호흡을 하는 해방의 기술이다.
풀내음을 맡으며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한발 한발 맨 살로 대지의 감촉을 느끼며 대지의 생각을 읽으며 걷노라면 어느샌가 일상에서 나를 짓누르던 그 모든 것들이 바람에 씻겨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