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에는 러시아 마피아나 킬러인 줄로 알았던 이자냐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현재도 러시아와 전시 상태인 우크라이나 정부에 그가 용케 징집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전쟁 발발 직전, 체코의 프라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누군가는 왜 조국이 핍박받고 있는 전쟁에 다른 이들처럼 자발적으로 참전하지 않느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건강해 보이긴 하나 나보다 연배로 보이는 얼추 60에 가까운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그건 너무 무리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평소 검도와 수영 같은 운동으로 단련된 나에게 현역 군인시절의 100킬로 미터 행군과 각개전투, 헬기 레펠 같은 훈련을 다시 수행하라면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후방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는 군대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장교나 부사관이 아닌 이상, 일반 병사들은 언제 어느 때 최전방 전선으로 차출되어 총알받이로 사용돼도 이상하지 않은 게 군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쟁 상황의 군대에서 전방으로 배치한다는 명령을 어기기라도 하려 든다면 이는 전시 즉결처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중대 범죄가 된다. 군대에서의 사병은 언제나 대체 가능한 그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그의 현재의 선택을 충분히 존중하고 지지하고 있다. 그가 영어를 하지 못하는 관계로 우리는 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번역기 어플을 통해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내 폰에 있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보기도 했으나, 우크라이나 언어의 인식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관계로 평소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어플로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와 한 달이 넘도록 알고 지내 왔지만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 못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 내게 반가운 표정으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가 내게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황량한 땅 위에 몇 개의 거대한 목재가 올려져 있는 사진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진의 의미를 몰라 몇 번을 물어봐야 했다.
"유럽에 있는 우리 보스가 드디어 건축비를 승인해 줬어."
이곳 발리에서 체코에 있는 보스를 대신해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제법 큰 규모의 콘도미니엄 건축을 진행하고 있던 이자냐는 매일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으로 출근을 하고 있던 터였다. 코로나 19 종식 이후로 세계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관광수요가 엄청난 속도로 늘자 발리 곳곳은 그야말로 온통 건설현장이 되었다.
이는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제주의 10년 전의 모습 같았다. 낡고 오래된 집들은 허물어지고 그걸 대신해 세련되고 멋진 숙소들이 마구 들어서고 있었다. 조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당장 폴란드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이자냐 역시 먹고살기 위해 그 개발 대열에 끼어든 것이었다.
"오... 축하해!!!"
비록, 발리의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대열에 동참한 그였지만, 그의 절박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나로서는 기쁜 마음으로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 콘도 하나 분양받을 수 있어?"
그에게 넌지시 농담을 건넸다.
"물론이지. 6개월 뒤면 완성되니까, 그때 사면 돼."
농담이었는데 그가 진담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마이너스 대출로 여행비를 감당하고 있는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콘도를 산다고,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담배인 한국 제품 에쎄 애호가, 이자냐는 한국 사람을 모두 부자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6개월 뒤면 빌딩이 완성된다고?"
나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었다.
"응. 일단 지금 계획은 그래."
강한 태풍도 혹독한 추위도 없는 이곳 발리의 주택들은 한눈에 봐도 좀 부실해 보였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은 채 대충 시멘트 블록을 쌓아 올려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거의 5층 가까이 되는 콘도미니엄도 이렇게 빨리 짓는다니.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이자냐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혹시라도 내게 돈이 생긴다고 해도 그의 콘도미니엄을 사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6개월 뒤면 드디어 폴란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어. 이곳 발리에 너무 오래 있었거든. 벌써 3년이나 지났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같이 파란빛을 띠는 그의 눈동자에 언뜻 물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