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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ug 06. 2024

물을 믿는다는 것, 세상을 믿는다는 것



어제는 이곳에 와서 최고로 우울감을 느꼈던 하루였다. 날씨가 좀 흐렸던 탓도 있었지만, 아침부터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상처가 떠오른 탓이 가장 컸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브런치 글도 그와 관련된 주제로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더욱 불편한 마음에 휩싸여 버리게 되고 말았다. 시간이 제법 지나 많이 극복하고 잊은 줄 알았는데 그저 곪은 상처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덮어 숨겨 놓은 것뿐이었다는 사실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브런치 글의 반응 또한 사뭇 걱정이 되었다. 명색이 여행 브런치 북인데 괜스레 불쾌한 기억을 꺼내어 읽는 사람들도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차피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지만, 내게는 나름 큰 상처였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은 애써 딱지가 덮인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할 수도 있던 탓이었다.

'상처를 상처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는 말을 어딘가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가끔 나도 그 말을 꺼내 곱씹으며 내게 일어난 일은 그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전환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걸 더 이상 상처로 여기지 말자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상처를 상처로 여기지 않으려면 이미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인지 단계에서부터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높은 의식세계가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때때로 상처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만지작 거리며 더욱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끝까지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는 한,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차갑고 경직되고 말게 된다.

어제, 화상영어 시간에 런던에 있는 선생님과 수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난 자유형을 할 때 호흡이 안돼서 너무 힘들어요."

그녀는 수영을 좋아하지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걱정이란 말을 했다.

"이곳 발리에 와서 매일 수영을 하고 있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호흡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물을 믿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요."

"물을 믿으라고요?"

"보통, 초보자들은 익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든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려고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연히 목에 힘이 들어가고요. 힘이 들어가면 우리 신체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어요."

"물을 믿는다는 게 어떤 거죠?"

"그냥 낮은 수영장 바닥이니까 익사할 위험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물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믿는거죠. 물을 믿고 물 좀 먹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정수리를 깊게 박은 체 호흡을 하면 다리가 뜨게 되어  몸은 도리어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돼요."

나는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명언인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만두고 말았다.

오늘 아침 수영을 하면서 생각했다.

'혹시 수영 역시 우리 인생과 같은 것이 아닐까?'

경직된 몸과 마음을 가진 채 분노로 울분을 터뜨리고 살고자 아우성을 칠수록 더욱 바닥으로 가라앉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설령,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준 그들만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옥의 나락으로 미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인생은 수영이고 세상은 물이다. 어떠한 풍파가 일어나도 물을 믿고 여유를 갖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에서 빛나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내게 상처를 준 그들 말고도 나를 수면 위로 떠올려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선하고 따뜻한 이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 있다고 전하니 개살구 작가님이 보내주신 말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얻을 것만 생각 말고 버릴 것도 한번 찾아보세요.'

내 속에 쌓여 있는 오랜 미움과 증오들을 이곳 발리의 바다에 하나씩 띄워 보내기로 한다.


나는 여전히 따뜻한 세상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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