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침이 삼켜지지 않을 정도로 목이 부은 것이 느껴졌다. 온몸은 누군가 밤새 두들겨 팬 것 마냥 욱신거렸다. 한국에서도 종종 찾아왔던 감기 몸살이란 녀석이 이곳 발리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그래, 우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이제 만날 때도 되었겠지.'
나는 마음에도 없는 반가운 척을 하며 녀석을 달래 보려 했지만 녀석은 요지부동 내 몸을 침대에 붙들고는 통 놓지 않고 있었다. 결국, 평소 기상시간보다 2시간이나 지나서야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배가 고팠다. 너무 심하게 아프면 밥생각이고 뭐고 하나도 안 나는데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닌 모양이다.
식사를 하고 돌아와 카톡을 살펴보니 자카르타에 사는 친구가 인도네시아 국민 감기약이라는 'tolak angin'을 먹으라고 추천해 줬다. 고마운 녀석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배민과 카카오택시의 서비스를 포괄하는 동남아 생활의 필수 어플인 그랩을 열었다. 어제 꽃작가님께서 감기에 좋다고 추천해 주신 생강원액을 주문했던 어플이었다. 약 제목을 쳤더니 몇 종류의 약들이 검색이 되었다. 그중에 어린이 용을 제외한 'tolak angin' 몇 개와 시럽형태로 된 기침약을 주문했다.
30여 분 정도가 지나자 배달 기사로부터 숙소 현관 앞 의자에 놓고 간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천근만근 돌덩이처럼 느껴지는 몸뚱이를 간신히 굴려 약을 가지러 나갔다. 약은 누런 봉투에 정성스레 담겨 배달되어 있었다.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도입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스템은 바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우리나라의 배민이나 요기요 같은 배달 서비스의 평균 요금이 3천 원 정도라고 할 때 이곳의 요금은 천 원 정도 하는저렴한 가격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여러 곳을 배달해 조금 늦게 받는 세이브 서비스를 선택하면 배달료를 몇 백 원 정도로 까지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설령 인건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의약품 배달 판매와 같은 서비스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자들의 이해 조정과 관련 법률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당장의 도입은 힘들 듯 보였다.
함께 떠날 감기 치료 여정의 친구가 될 약들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톨락 안진'은 시럽 형태의 물약으로 은근히 맛이 좋았다. 마치 목캔디를 물에 녹인 맛이라 그 시원한 느낌이 침 삼킴을 용이하게 해주고 있었다. 효과를 좋게 하기 위해서는 따뜻한 물에 희석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다 먹은 후에서야 검색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생강차와 톨락 안진과 기침약을 차례차례 입 안에 때려놓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낮잠을 자 본 적이 없던지라 통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 특급 자장가인 도서 소개 유튜브 '일당백'을 열었다. 아직 보지 못한 '종교개혁' 에피소드가 눈에 들어왔다. 일당백의 진행자인 정박님의 구수한 목소리를 들으니그제서야 단잠에 들 수 있었다.
얼마를 잤을까? 시계를 보니 거의 네 시가 다 되었다. 감기약에 졸음 성분이 있다더니 정말 밤잠 같은 낮잠을 자고 말았다. 일당백은 잠들 무렵 체코의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의 이야기를 하더니 지금은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2,0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자면서 뭔가 유익한 이야기를 가득 들은 것 같긴 했으나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게 맹점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일당백의 '좋아요'버튼을 꾹 눌렀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시켰다. 아프니 좀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내 아픈 몸은 도리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야, 좀 아프니까 먹고 싶은 것 좀 먹자.'
인도네시아 국민감기약과 생강차의 효험일까? 한국에서는 며칠을 앓던 감기였는데 이곳에서는 하루도 안되어 다 나은 것 같았다. 목의 이물감도 사라져 침 삼킴이 자유로워졌으며, 욱신거리던 몸의 통증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니면 마음이 편해서 더 빨리 회복된 걸까?
싱글 피자 두 개를 연달아 먹어 치우며, 좋아하는 배우 장나라의 최신작인 '굿파트너'를 요약한 유튜브영상을 봤다. 처음에는 30분짜리로 보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금세 1시가 반짜리로 갈아탔다. 과연 장나라가 대형로펌의 노련한 파트너 변호사를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이는 기우였다.
그녀는 자신의 동안 외모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의 약점을 냉정하고도 차분한 연기로 확실하게 커버하고 있었다. 대본 역시 다른 법정 드라마와는 다르게 판례 연구를 꼼꼼히 한 듯 억지스럽지 않고 개연성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나온 최고의 법정 드라마였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우영우는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좀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느껴졌었는데 '굿 파트너'는 그러한 억지스러움이 없어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굿 파트너' 영상을 다 볼 때쯤, 책상 위에 놓였던 싱글 피자 두 판도 몽땅 사라졌다. 그리고 아파서 우울했던 마음 역시 그와 함께 사라졌다. 방 안에 갇혀 한국 유튜브 영상을 하루종일 보았더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