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부른 궁전- 빈 미술사 박물관
11살 일기
오늘도 한국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어제 먹었던 김치찌개보다 맛없었다. 자꾸 김치찌개가 생각난다.
9살 일기
작은 미이라를 많이 봤다. 무서웠다.
오늘은 쇤부른 궁전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쉽게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샘'을 뜻하는 쇤부른 궁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황제가 사냥할 때 머물던 작은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가 지은 거대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 영향을 받은 이 노란색 3층 건물에 있는 방의 숫자는 무려 1441개나 된다.
그 많은 방들 중에 우리는 일반인들에게 관람이 허용된 45개의 방을 볼 계획이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씨였지만 쇤부른 궁전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티켓의 종류는 22개의 방을 볼 수 있는 임페리얼과 40개의 방을 볼 수 있는 그랜드 투어가 있었다. 우리는 그랜드 투어를 선택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더 많이 관람할 수 있는 쪽을 선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방을 지나 사방이 온통 거울로 도배된 ‘거울의 방’에 도착했다. 어린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는 당돌하게도 공주인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청혼을 했다고 전한다. 귀족과 성직자의 하인에 불과했던 당시 음악가의 신분은 아무리 모차르트라도 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신분에 걸맞게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혁명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의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모차르트와 결혼하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행복한 일 아니었을까? 하긴, 모차르트도 단명했으니, 그 어느 쪽도 확실한 행복은 아니었을 듯싶다.
어제 먹은 한식이 만족스러웠을까? 아이들은 오늘도 한식 타령을 했다. 하는 수 없이 검색을 통해 발견한 '요리'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찾아갔다. 이곳 빈 사람들을 위해 덜 짜고 덜 맵게 만든 일종의 퓨전 형태의 한식집이었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는 심심하게 느껴지는 다소 아쉬운 맛이었다. 그래도 한국인 종업원의 친절과 차분한 실내 분위기가 그 심심함을 채워주며 위안을 주었다.
어제 들르지 못한 미술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미술사 박물관은 어제 들렀던 자연사 박물관과 마주 하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려는데 직원이 내 얼굴을 보더니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그는 내게 무심하게 표를 건네주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침 공교롭게도 내 뒤에 서 있던 이가 일본 여자였다. 그녀가 일본 사람이라고 말을 하자 매표소 직원이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이것저것 한참을 물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듯 보였다. 왠지 무시당한 느낌에 마음 한가운데서 무안함과 서운함, 그리고 화가 올라왔다.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유럽 사람들이 생각보다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고 많이 알고 있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사실 유럽인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은 제법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시대. 황금의 나라 '지팡구'로 전설처럼 알려졌던 일본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후반 파리의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르느와르, 모네, 고흐 등이 특히 그러했는데 벚꽃을 묘사한 듯한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같은 고흐의 몇몇 그림은 일본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일본 문화는 프랑스를 비롯한 이곳 유럽에서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질투 섞인 부러운 마음과 동시에 우리 문화의 매력 또한 그들에게 조금 더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미술사 박물관은 어제 들렀던 자연사 박물관과는 달리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해줘서 좋았다. 전시 물품들은 미술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범주를 넘어설 만큼 방대하고 다양했다. 특히 이집트의 유물들은 비록 작은 크기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과 생활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순간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이 많은 이집트의 유물들이 이집트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 빈에 모여있는 것일까? 이집트 사람의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자신들의 유물을 이 머나먼 타국에서 봐야 하는 일은 꽤나 수치스럽고 심란한 일일 듯 싶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가슴 아픈 경험들이 있었기에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규장각의 도서들에 대해 느끼는 우리네 감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 같았다.
보고 싶었던 브뤼헐의 '바벨탑'으로 미술사 박물관에서의 관람을 마무리한 후 빠져나왔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데 검은색 연미복 차림의 동양 젊은이들이 무리 지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빠 보이는 걸음걸이가 당장 있을 음악 발표회라도 가는 것처럼 보였다.
"늦진 않겠지?"
"빨리 서두르자."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우리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라니!
순간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도 일본을 부러워했던 마음이 묘하게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외국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