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상평상 Sep 03. 2019

"훈데르트 봤어?"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시민공원- 슈테판 대성당

11살 일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봤다. 가우디가 만든 집들과 비슷해서 좋았다. 이런 집에서 살면 좋을 것 같다. 


   

9살 일기

아침 일찍 일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빠 유머는 시시하다.




어제의 게으름을 만회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도나우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에 등장하는 바로 그 도나우 강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했다. 이 곡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의기소침해진 빈 시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만든 곡으로 원래는 남성합창곡으로 작곡되었지만, 후에 합창이 빠지면서 관악기와 현악기로만 연주되는 왈츠로 편곡되었다.

 

도나우강은 영어로는 다뉴브, 체코어로는 두나이, 헝가리어로는 두나라고 불리는데 모두 도나우강을 뜻하는 라틴어 '두나비우스'에서 유래한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북부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한 후, 우리가 들렀던 인스브루크의 인강과 합류해 커다란 강으로 탈바꿈한 도나우강은 이곳 비엔나를 지나 체코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거쳐 흑해로 빠져나간다. 앞으로 우리가 들를 체코와 헝가리까지 계속 이 도나우강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함께 여행하는 동료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빈 시내를 흐르는 도나우 강의 모습

아침 운동으로 나선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훈데르트 바서가 지은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이상적인 주거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빈 시당국의 제안으로 1985년에 완성된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는 50세대 정도가 모여 사는 건물에 상점과 어린이 놀이터, 카페 시설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일종의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8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인 까닭에 중국인 관광객 몇 명 말고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관람할 수 있어 좋았다. 건물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이 빨강, 파랑, 노랑의 원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있었으며 직선과 곡선이 적당히 섞여 부드러운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건물 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들과 중앙 정원의 채광을 위해 설치된 커다란 창문 아래로 흐르고 있는 덩굴 식물들은 숲 속 마을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의 채색과 곡선을 보고 있노라니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가우디의 작품들의 그것들이 떠올랐다. 둘은 닮아 있었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가 왜 훈데르트바서 하우슨지 알아?"

"훈데르트바서가 만들어서 그런 거 아녜요?"

"응, 그것도 있는데 훈데르트바서가 이 건물을 지을 때 자꾸 사라졌다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찾아다니며 이렇게 이야기했대."

"훈데르트 봤어?"

"응, 어떻게 알았어?"

"아빠 유머야, 뭐 뻔하지."

"아, 시시해."


내 아재 유머를 대번에 알아맞힌 일우에게는 좀 무안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기억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실제로 그 후, 제주도에 돌아와서 관람한 '빛의 벙커'전시회에서 '훈데르트 바서'의 작품을 보았을 때, 아이들 모두 "훈데르트 봤어?"라고 외쳤으니 내 의도가 어느 정도 먹힌 건 아닌가 싶다.

파랑 노랑 빨강의 원색과 초록빛이 잘 어울렸던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내부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클림트의 작품 '키스'가 인쇄된 황금색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있을 아내가 떠올라 하나 구입했다. 화사한 노란색이 어울릴 것 같아 고르긴 했지만, 정작 좋아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뭐 아내가 안 쓰겠다면 나라도 쓰면 되는 일이었다.

     

우산을 사서였을까? 갑자기 어둑해지더니 때맞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념품 가게 주인은 일기예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상점 입구 전면에 우산을 배치한 그녀의 영업 전략이 제대로 적중한 듯 보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기세 좋게 내릴 것 같았던 비는 금세 그치고 말았다. 어쩌면 이 소나기는 그녀가 부른 게 아닐까?

우리는 훈데르트 바서 마을을 지키는 경찰들이닷!

우리나라의 청계천 정도 너비의 도나우 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정비된 하천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빈은 도나우 강의 강폭이 좁아지는 구간인 듯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시민과 헤드셋을 낀 채 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이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각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한적한 풍경과 춤추듯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어디선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시내 중심부 쪽 도나우 강의 모습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걷는데 커다란 도로가 남북으로 교차하는 사거리를 만났다. 남쪽으로 내려가니 녹색의 식물들이 가득한 시립공원이 펼쳐졌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공원답게 공원 곳곳에는 슈베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같은 음악가의 동상들이 놓여 있었다. 


부드럽고 화사한 왈츠의 선율 때문이었을까? 젊고 온화한 모습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상상했던 나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동상에 꽤나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얼굴이  재기 발랄한 예술가라기보다는 백전노장의 군인같이 고집스럽고 단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지 않았다면 음악가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상

공원을 지난 후, 차도를 건너 걷다 보니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다는 슈테판 대성당이 나왔다. 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성당의 종탑에 올랐다. 하지만, 흐린 날씨 때문이었는지 종탑 위 전망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동안 다녔던 다른 도시들의 전망이 워낙에 훌륭했던 탓도 있었으리라. 다음에 빈에 들를 기회가 생긴다면 이곳에 맑은 날에 올라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 다른 도시들과의 공평한 경쟁이 될 테니까. 그나저나 그런 기회가 오기는 할까?

다소 어수선하게 느껴졌던 빈 시내의 전망

종탑에서 내려온 우리는 대성당의 내부로 입장했다. 성스럽고 장엄한 예배당의 한가운데에 앉아 남은 여행의 안전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안녕을 기도했다. 문득, 이 아름다운 대 성당의 지하에 흑사병으로 죽은 유골 2000구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거룩한 공간에 앉아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갈구했을 터였다. 흑사병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이 매달렸을 기도의 간절함이 몇 백 년의 시간을 넘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서글픔과 무상함이 나의 가슴을 화살처럼 꿰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슈테판 대성당의 모습




이전 14화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