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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대문 집

by 함지연

남도 여행 중에 우연히 초록색 대문이 있는 집을 보았습니다.

홍매화가 흐드러지던 계절이었지요.

녹슨 초록색 문 담장 너머로 홍매화꽃이 가지가 휘어지게 달려있었어요.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집이었어요.

초록색 대문은 나의 유년 시절을 소환합니다.

할머니 댁의 대문도 초록색이었어요.

연년생 삼 남매의 첫째였던 나는 할머니 댁에 자주 맡겨졌고, 그래서

조부모, 고모와의 추억이 많아요.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지금도 선명해요.

중앙에 집이 있어요. 서늘한 마루와 툇마루, 서까래가 있던 집.

왼쪽에 외양간이 있고, 오른쪽에 살구나무와 화단이 있어요.

외양간엔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그네가 흔들리고, 어느 해인가 죽은 새끼 돼지를 땅에 묻는 할아버지 옆에 내가 있어요.

동그랗게 뭉쳐준 어른 주먹만 한 누룽지를 깨물어 먹는 내가 있고, 밤중에 변소에 갈 때면, 변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있어요. 할머니, 거기 있어? 무서워서 자꾸만 묻는 내가 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고모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린 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고, 초록색 대문을 열고 흰 카라가 있는 교복을 입은 고모가 마침내 들어오기도 합니다.

달력 뒤에 한글을 써서 가르쳐주신 할머니와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신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에서 나는 나무와 흑연냄새도 그립습니다.

개구리가 울고 쓰르라미가 울고 소쩍새가 울고, 기차가 자주 지나갑니다.

모깃불을 피워 뿌연 밤이 있고, 눈을 감고 누워 가까이 다가왔다가 차츰 멀어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슬프기도 했던 날도 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녹이 슬고 조금씩 부서지다가

사람들이 가고 없고, 소와 돼지 울음도 사라지고

오래 적막했던 집은 이제 개망초꽃만 무성한 채로 터만 남았습니다.

집이 있던 흔적은 사라지고, 장독대로 쓰였던 넓적한 돌 몇 개만 뒹굴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슬프고 아련하고 그리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던 나의 초록색 대문도 사라졌어요.


모르는 사람의 초록색 대문 앞에 서서 어쩐지 그 대문 너머의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그 대문 안에는 어떤 다정하고 아련한 이야기들이 사라졌을지, 또는 사라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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