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의 이유로 나는 나를 버렸었다. 이유는 여러 고민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다. 알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나를 버렸다. 근 1년간은 버려졌던 나를 줍고 있었다. 주울 때마다 내밀한 이야기를 스스로 나누고 오래된 심경은 크게 변화했다. 매번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20대의 마지막 사랑이 나를 떠나갈 때 크게 동요했다. 진실은 거짓의 민낯이 되기에 과거의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던 나를 사랑하던 그 사람이 나에게 쥐여준 건 현실과 침착이었다.
니트를 입는 계절이 왔다. 원단이 좋은 니트를 매만지며 기분을 잡는다. 늘 이별하고 살고 있다. 추운 계절이 좋았다. 땀이 많은 편이라 여름이 참 싫었는데 나이가 들며 느끼는 건 겨울은 너무 춥다. 정말 너무 추워서 시리다.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을 몸소 느끼니까 늙어버린 기분에 짧게 미소가 난다. 나에게는 외면이 어렵다. 어려워서 참 쉽다. 니트를 건조기에 넣으면 줄어드는 것처럼 실수하면 관계는 복구가 어렵다. 그래서 외면을 배운다. 대면하지 않으면 외면도 없다. 외면은 외면을 낳는다. 그 사람을 외면하고 싶다. 이제는 더 이상 미련을 가진다면 복구할 수 없이 내가 망가질 거 같다. 일말의 상처도 외면하며 괜찮아질 때까지 미련을 버리고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건 눈에 포착되기 쉽다. 가벼운 배려는 오랫동안 몸에 쌓여야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그건 그만큼 누군가를 신경 쓰며 자기 일상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눈빛은 소화할 게 없다. 이다지도 무해한 것. 들끓는 낭만도 들쑤시는 현실도 모두 서로의 손에 담아 꽉 잡는 것.
나는 사랑이 좋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