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걔 얼굴이 안 보이네” “걔랑 무슨 일 있어?” 하나둘씩 내게 너의 안부를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쁜 거 같아”라는 말로 핑계를 댄다. 그냥 머릿속으로 떠올려도 아픈 너의 그 이름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야 한다. 미세한 표정 변화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별 일 아닌 듯이. 나도 모르는 너의 안부를, 나도 궁금한 너의 일상을 거짓말로 둘러댔다. 사람들은 자주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 궁금했을 거고, 조용히 숨어버린 너는 없으니까 결국 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슴은 타 들어가도 아픈 척 않고, 너의 존재를 숨기는 일이 내게 더 큰 아픔이었다.
내게 너의 안부를 묻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내심 원망스러웠다. 굳이 숨어버릴 이유가 있었는지, 왜 피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말이다. ‘원래 사이로 돌아가자’ 했으면서도 결국 지키지 못할 말을 왜 내뱉었는지 보이지 않는 너를 괜히 탓했다. 그리곤 다시 생각해 보니 미안해서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는 오히려 의심과 변명으로 느껴졌다. 명백한 증거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떳떳하지 못한 잘못이 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웠고, 죄책감으로 이어졌다면 너를 더 욕하고 미워했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남아 있는 감정을 사랑과 미련을 구분하지 못한 채 붙잡았기에 차마 나쁜 말로 저주를 퍼붓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못내 아쉬웠다. 완곡하게 돌려 돌려 표현한 말에도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대놓고 시원하게 마음속 말을 다 퍼붓고 깨끗하게 털어낼 걸 싶었다. 어차피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거라면 평생 그 마음 잊지 못하게 말이다.
자신만의 기준과 선이 분명하고 확고한 신념이 있다는 게 매력이었다. 그 말을 온전히 믿으면 안 되었던 건가 하고 또 내 탓을 하게 되지만, 어쨌든 너의 가치관과 신념은 옳지 않았다는 거, 그리 쉽게 무너질 거였다면 애초에 바른 정신으로 탄탄하게 쌓아 온 신념이 아니었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떠난 그 순간부터 조용히 너의 흔적과 자취를 감춘 후에도 나는 너의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아파야 했다. 이렇듯 너에게 쏟아지는 모든 질문을 내가 일일이 다 받아내야 하는데, 이런 내 상황을 아는지, 이 아픔을 네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지. 네가 사라졌다고 해도 사라진 게 아니었다. 지금 옆에, 곁에는 없어도 내 기억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너의 존재와 안부를 궁금해할 테니까.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고, 안 아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아팠고,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났다. 누가 너의 안부를 내게 물으면, 나도 너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꼭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던지는 물음표들이 내게는 화살보다 더 날카로웠다. 친함 이상으로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정도로 꽤 깊은 사이였기에 이 시간이 고통스러운 거라고 생각한다. 결별이 고통이 된다는 건 누군가와 맺은 결속이 진실했다는 걸 말하기 때문이다. 진실만이 고통을 주니까. 사람들에게 “바쁜 가보다”라고 말하면서도, 너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적어도 나는 바보같이 진실했다.
그렇게 또 누군가 내게 너의 안부를 물으면, 나는 또 웃으며 거짓말을 해야 한다. 분명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용기 있게 말했는데, 이렇게 쉽게 또 흔들린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머리로 가슴을 이겨내야 한다. 사랑은 가슴으로 해도 이별은 머리로 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듯 때론 상대의 평안과 안녕을 묻는 안부의 말들이 내게는 상처이자 아픔이 되기도 한다. 어린아이가 주사를 맞을 때처럼 아프면 울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이 되었어도, 헤어짐에는 마음 여린 어린이가 되는 우리는 아프다고 말도 못 한 채 주사 바늘에 찔리는 고통이어도 눈물 찔금 흘리지도 못하고 아픔을 참아낸다. 그렇게 이겨낸다. 어른은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워왔으니까. 그리고 그런 아픔쯤은 견뎌야 성장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서 너의 안부를 듣고 싶지 않다. 너의 안부보다 나의 안부를 스스로 더 챙겨야 할 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