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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박 Sep 30. 2024

코리아타운의 기원을 간접체험하다


미국에 오기 전 LA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할리우드 사인이 있고, '유승준이라는 비운의 가수가 사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다. 

생각 나는 또 다른 키워드로는 1995년 SBS에서 방영된 'LA 아리랑'과 'LAPD' 등 몇 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개월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LA가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독광부였던 고(故) 이희덕 전 한인타운 번영회장이 1970년 현재의 올림픽 가와 하버드 남쪽에 있던 2층짜리 빌딩 1층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켓을 구입, '올림픽 마켓'이라고 이름을 붙이며 식료품 가게를 연 것이 오늘날 LA 한인타운의 시초가 된 것이었다. 

고(故) 이희덕 회장은 한인 사업가들과 코리아 개발 협회(KDA)를 조직했고 부동산 개발업자들과 올림픽 가를 따라 싼 토지와 부동산을 구입해 한인 상인들에게 임대했다고 한다. 한인공동체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올림픽 가에서 연례 축제를 처음 개최한 연도가 1974년이라고 한다. 1980년에는 드디어 이들 지역이 LA로부터 공식적으로 '코리아타운'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나는 지난 28일 토요일(미국 현지시간) 제51회 코리아 퍼레이드에 스텝으로 참석해 퍼레이드 참석하시는 분들의 순서를 조율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LAPD들과 시 관계자들이 올림픽 가를 통제해서 차들이 오고 가지 못하도록 했고 40개가 넘는 단체에서 나와 코리아타운 일대를 행진했다. 

내가 기자가 된 이유는 사회현상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리아 퍼레이드를 바라보면서 지난 반세기 이상 한인들이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정말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왔고 오늘날 한인들의 위상을 구축했구나 하는 자긍심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코리아타운은 상당 부분 쇄락해 가고 있다. 2008년 4만6,000명 이상이 거주하던 코리아타운 내 한인 인구는 올해 기준 2만3,000명대로 절반 가량이나 줄었다. 노숙자들도 많아지고 각종 한인관련 폭행, 사망사고도 늘어나는 등 치안도 나빠지는 추세다. 비즈니스나 학군을 따라서 오렌지카운티 등으로 이주하는 한인들도 늘고 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리적인 바운더리 안에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세상은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경계가 사라졌고 언제 어디서나 비즈니스를 할 수 있고,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게 변한지 오래다. 

비록 내가 미국에 머무는 기간은 짧지만, LA에 사는 한인이자 관찰자로서 LA 코리아 타운의 태동을 알게 되고 퍼레이드의 스텝으로 참여, 한인들의 삶을 간접체험했다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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