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힘.
버거를 처음 먹어본 게 언제였더라.
어쨌든, 이날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윤정이의 언니는 버거를 한 개 사들고 잔디밭에 나타났다.
어린이날기념 글쓰기대회는 여러 해 대공원 잔디밭에서 열렸다. 무슨 이유에서 내가 그 글쓰기에 참여를 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윤정이와 원고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윤정이의 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어린이대공원으로 왔을 때는 정오 가까운 시간이었고, 회사를 빠지고 대회에 참석하는 동생을 기꺼이 이곳까지 공수한 그녀는 버스에서도 윤정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네가 윤정이 친구구나,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녀는 우리에게 이곳에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말한 뒤 부리나케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고,
그렇게 햄버거를 들고 나타났다.
돗자리에 놓인 원고지에 연필심이 눌려 글씨를 몇 번 지우기는 했지만, 살랑살랑 봄바람에 내 사유보다 글이 더 앞서 나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던 찰나였다.
그녀는, 비닐봉지에서 햄버거를 꺼냈다.
햄버거는 한 개였고, 언니는 그걸 윤정이에게 건넸다. 윤정이는 "와! 햄버거다!" 하며 한입 덥석 문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는 연필 끝을 바라보며 윤정이의 입꼬리에 묻은 케찹과 패티에서 풍기는 버거의 잔향을 공감각을 동원해 느꼈다.
그건 배고픔에 앞선 민망함과 자포자기 같은 감정이었는데 행사 측에서 내준 '봄'이라는 주제와
동떨어진 것이라 뭉툭한 연필은 골똘히 원고지에 멈춰 섰다가 잠시 후,
허둥대며 움직였다.
사실 난 윤정이와 친구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사이었고 그녀의 언니가 나에게까지 햄버거를 사줘야 할 이유는 하등 없는 거였지만
나는 너무 배가 고팠고, 그저 햄버거를 먹고 싶은 간절함이 '봄'이라는 주제보다 컸을 다름이었다.
집에 오니 저녁나절이 됐었나.
나는 엄마에게 너무 배가 고파, 봄이 주제였는데, 봄 자체를 햄버거처럼 다 꼭꼭 씹어먹겠고 말겠다는 글을 썼다고 말했다, 이때 엄마는 내게 글쓰기 대회를 나갔느냐고 반문을 했고
그 바람에 햄버거에 맺혔던 결기가 배꼽으로 실없이 피식 빠져 버렸던 밤.
그리고, '햄버거'에 관한 미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초여름의 문턱,
교실에서 아이 몇이 친근함을 표시하며 다가왔다.
늦돼서 친구가 없던 나는 느닷없이 따뜻한 말투에 버벅거리다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담임을 졸졸 쫓아갔고, 운동장 단상에서 상을 받았다.
햄버거를 먹고 싶어,
봄을 꼭꼭 씹어먹어 버리고 싶다던 열 살 아이의 주절주절한 문장이 그들의 마음 어느 부분에 와닿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글은 신문에 실렸고, 내 이름조차 몰랐던 아이들이 연필을 빌려준다거나, 간식을 같이 먹자고 내 자리로 하나둘 몰려들어,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
그러니까......
이것이
글쓰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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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제목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