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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Mar 14. 2022

이유식을 저으면서도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삶

타샤 튜더 할머니는 아니지만

나는 애가 셋이다.

4살 딸과 2살 아들 쌍둥이는 모두 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이이다.

 

타샤 튜더 할머니가 그랬다.

가정주부는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거늘.

 

나에게 적용한다면 이유식을 저으면서도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삶이라 하겠다.


박완서와 박혜란의 수필을 좋아한다.

그녀들의 글뿐만 아니라 주부로 오랫동안 살다가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고 그 글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는 점이 위로가 된다.

막상 영유아 셋을 키워보니 왜 그녀들이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넋이 나갈 만큼 힘든 순간이 있다. 

텅 비어버린 육체와 달리 차오르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자꾸만 질문하게 된다.

어딘가에 쏟아붓지 않으면 내가 펑 터져버릴 듯하다. 

그녀들도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쓴 게 아닐까.


쌍둥이 유모차를 밀고 옆에 딸아이 손까지 붙잡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난데없는 칭찬을 종종 듣는다. ‘참 복도 많지, 부자네 부자.’ 이런 칭찬엔 웃을 수 있는데 가끔은 표정관리가 안 되는 칭찬도 있다. 


그중 첫 번째가 ‘애를 셋이나 낳다니 애국자네!’란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인력을 생산한 것도 아닌데 애국자라니. 

분명 좋은 말인데 나는 다른 사람이 받을 상을 잘못 받은 것처럼 떨떠름하다. 


나라 좋으라고 애를 낳은 게 아닌데... 


뒷말은 늘 내 혀끝에만 맴돌다 만다.


나는 왜 애를 셋이나 낳았지? 

둘까지 일단 낳아볼까 했다가 어쩌다 보니 셋이 된 건데... 

첫째 딸을 키우며 너무 예뻐서 자동으로 하나 더! 를 외쳤다가 1+1으로 쌍둥이를 갖게 된 나는, 

그래서 기약 없이 일을 쉬고 집에 들어앉은 나는, 애국자란 소리를 들어도 될까? 

불매운동을 한 것 말고는 딱히 ‘애국’을 위해 노력한 기억이 없는데... 

만약 계속 난임이었다면 나는 나라에 못할 짓을 하는 건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가? 가슴에 상념들이 쌓여갔다.


또 다른 낯 뜨거운 칭찬은 바로 딸이랑 아들이랑 고루 낳았으니 ‘만점짜리 엄마’라는 말이다.

이런 표현엔 늘 애매하게 웃게 된다. 

이 시대엔 아직도 딸만 낳거나 아들만 낳으면 뭔가 부족해 보이는 걸까. 

성별만큼은 인간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더더욱 엄마의 노력으로 고르는 게 아닌데 왜 이것이 몇 점짜리 엄마로 표현되는지 항상 긴가민가했다.

 

나의 친정엄마는 딸 셋을 낳았고 내가 첫째 딸이라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주변의 탄식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 무언의 안타까움을 보면서 동생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에 부당함을 느꼈다. 그때보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엄마는 내가 딸과 아들을 고루 낳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신다. 


딸만 낳았으면 친정엄마 탓을 하지 않았겠냐고...

이게 올바른 대상에 대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딸인 게 잘못 일리 없다. 


아무튼 나는 이런 칭찬들조차 고깝게 듣는 사람이라 그런지 항상 가슴에 물음표를 달고 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이 아닌가?

육아도 일일까? 주부도 직업일까?

아이 셋을 낳고 직장에 기약 없이 돌아가지 못하고 일을 쉬고 있는 나는 일하러 나가면 애들을 팽개치고 나간 엄마가 되고 일하지 않으면 남편 덕에 편히 먹고사는 여자가 되는 건가.

마음이 편치 않는 생각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아이들이 잠들면 서재에 기어들어갔다.

아이들이 깰 때까지 시한부 휴식은 너무나 짧지만 그만큼 책 읽기에 금세 빨려 드는 시간이었다.

애들이 깰까 봐 숨도 참으며 읽던 책들 속에서 나는 슬며시 위안을 얻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홀로 있으며 침잠할 수 있었다. 

마치 반신욕 하며 멍하게 있다가 물속으로 머리까지 푸욱 잠기는 느낌처럼 책 속에 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책에 빠져 있다가 나오면 가슴속 물음표들이 서서히 느낌표로 바뀌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나 같은 사람들도 많을까. 애를 키우느라 집에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일을 쉬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이기도 힘들다.

온라인 책모임을 만든 것은 그즈음의 상념들이 끊이지 않아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 방안 중에 하나였다.

좋아서 하는 공부는 시험을 위한 공부와 달리 즐겁게 같이 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온라인 책모임을 하며 제일 좋은 건 무엇보다 세상에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책 읽기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절대 고르지 않았을 책을 구경해 보는 것,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보다 더 나에게 적합한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매일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 책을 추천하며 시간을 보내는 순간만큼은 24시간 일터인 집에서 잠시 벗어나 나로서 숨 쉬는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독서소모임이 1년 반이 넘어가자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이 사람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1년은 동굴 속에서 밖을 바라보며 갑갑해만 했다면 쌍둥이를 낳고 지금까지는 매일 독서소모임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눴다. 


개인적인 취미라 여긴 ‘책 읽고 수다 떨기’가 점차 모두의 취미이자 사랑방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읽는 것보다 더 깊이 더 즐겁게 책을 읽게 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전국 곳곳인 책모임의 동지들과 매일 책 이야기를 나누니 친한 친구들보다 더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김경일 교수가 말한 ‘느슨하지만 넓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을 만끽하고 있다. 

부캐가 있는 삶은 현실의 힘듦을 잠시 내려놓고 꿈속처럼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해 주어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매일을 꾸려갈 힘을 주는 듯하다. 다양한 관심사가 생기면서 혼자서도 충만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평범한 날이 완벽한 날임을 알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덕에 다행히 감옥과 같은 생활 속에서도 우울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충만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는 잠시 공간과 시간을 멈추고 혼자만의 골방에 들어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서 창백한 얼굴로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내가 아니라, 생활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게 되었다.


남편은 내가 아이들을 낳고 내면이 더 단단해진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저 아이들로만 채워지지 않는 나만의 영역이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김영민 교수님의 책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공부의 효용에 대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정신의 척추기립근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꼿꼿한 척추기립근 덕에 스스로를 매일 일으켜 세우며 부지런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남편과 세 아이라는 나만의 가정을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내 마음의 뿌리 같은 단단함을 주었다면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는 과정은 스스로에게 물과 햇빛을 주는 나만의 시간들 덕분임을 안다.

 

하루하루를 어제보다 조금씩 더 성장하며 보내고 싶다.

인생이란 몰랐던 것을 아는 기쁨도 있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 전혀 몰랐던 것임을 아는 기분 좋은 순간들이 쌓이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낳고 행동반경에 제약이 생기고 나서야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외부를 향해서만 열려 있던 레이더가 내부로 방향을 바꾸게 되면서 고립이 아니라 탐구,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 쓸쓸함이 아니라 감사를 배우게 되었다. 30대가 되어 내면이 더 알차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나의 직업으로서의 생산성은 잠시 쉬어도, 아이를 낳고 내 스스로의 관심사를 찾는 내적인 성취가 더 많아져서인가 싶다.


일을 쉬는 초반엔 정체하는 느낌이 싫어 쉬어도 쉬지 못하고 늘 예약한 기차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매일을 살뿐이다. 


어제가 전생의 기억처럼 오늘이 처음 맞는 날처럼 그렇게.

 

아침에 눈뜨면 아기침대에 짚고 서서 나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싱그럽다.

우리 엄마 표현으론 


새 꽃이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 새로운 꽃이 피듯 깨어난다.


나도 그렇게 깨어나고 싶다.  



위 글은 달서 2021년 달서 책사랑 주부 수필대회에서 수상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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