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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진 Oct 27. 2020

조건 없이 베푼다

친구의 이름은 김효성이었다. 친구와 나는 1980년 초등학교 2학년 같은 반 친구였다. 유달리 하얀 얼굴은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기,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의 얼굴은 보통 거무튀튀한데 효성이의 얼굴은 달랐다. 사실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달랐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옷도 다르고 책상도 다르고 화장실도 다르고 밥상도 달랐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정확히 그것을 생각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짜 많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마당은 넓었고 초록색 잔디가 깔려있었다. 우리 집처럼 툇마루가 있지도 않았고 기와가 얹힌 집도 아니었다. 그냥 하얀색 납작한 건물이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이 훤하게 보이는 크고 깨끗한 유리창을 가진 집 말이다. 남색 철제 대문을 통과하고 마당 잔디 옆으로 오솔길처럼 만들어진 자갈길을 지나면 니스가 칠해진 밝은 밤색 현관문이 나를 맞이했다. 잠시 후, 그 문이 천천히 열리고 나면 효성이가 밝게 웃으며 나타났다. 사실 남들처럼 아주 환한 웃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 순간이 효성이에게 있어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효성이는 언제나 수줍음을 동반한 웃음을 짓곤 했으니까.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효성이를 찾아갔다. 언제나 편안한 복장으로 나를 맞이했던 효성이가 깔끔하게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은 효성이와 못 놀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지만, 효성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효성이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오늘 하루 종일 집을 비울 것이라고 말하며, 나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치켜세우고 미소 지었다. ‘만원’ 그 당시 만원은 매우 큰돈이었다. 전자오락 한 판에 50원, 짜장면이 200원 정도였으니 오락은 200번을 할 수 있었고, 짜장면은 50그릇이나 먹을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놀곤 했는데,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나려는 듯 효성이의 얼굴이 빛났다.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은 쌀쌀한 일요일 오전, 우리는 제기동으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거기에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새 학년을 앞두고 있을 때만 허락되었던 곳, 백화점이 있었으니까. 설레는 마음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금세 백화점에 도착했다. 먼저 허기진 배를 달래기로 했다. 우리는 떡볶이와 어묵을 잔뜩 앞에 두고 별다른 말없이 음식을 삼켰다. 말없이 마음으로, 혹은 눈으로 소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말은 별로 없을지라도 어색함도 불편함도 없었으니까. 효성이가 어묵을 계속해서 시켰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어묵을 먹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늘 어묵 하나에 주인아줌마 눈치를 살피며 국물만 더 달라곤 했었으니까. 큼직한 하얀 무가 담긴 그릇에 어묵이 다시 채워졌다. 조금씩 불러오는 배가 야속했지만 끄떡없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무한정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 내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배가 터질 정도로 어묵과 떡볶이를 먹은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효성이가 만 원짜리 지폐를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순간 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움 같은 것이 아니라 뭔가, 의심의 눈초리 같은 거였다. 효성이는 익숙한 듯, 태연히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멈칫했던 아주머니는 그제야 믿음이 생겼는지, 기다리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당시 내 한 달 용돈이 250원이었는데, 음식값으로 형과 누나들의 용돈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큰 금액을 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나타난 아주머니가 효성이에게 한눈에 봐도 두툼한 거스름 돈을 건넸다. 주머니에 자연스럽게 돈을 찔러 넣는 효성이가 갑자기 형처럼 느껴졌다. 우리 앞에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는 듯했고,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볼 거 같은 착각을 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일 층, 이 층, 삼 층 백화점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효성이와 나는 조립식 장난감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점 앞에 멈춰 섰다. 우리가 서있는 곳 바로 옆, 커다란 유리 상자 안에 진짜처럼 보이는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군인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유리에 코를 바로 맞대고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군인들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리고 저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올라왔다. 효성이도 마찬가지인지, 내게 한마디 건넸다.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불현듯 효성이가 내게 영국 탱크가 그려진 박스를 집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탱크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지만, 재촉하는 듯한 효성이의 눈빛을 보고 제대로 들었음을 인지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효성이가 장난감을 집어 내게 건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넋 놓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감 박스가 내 손을 경직시켰고, 온몸에 어색함이 퍼져나갔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효성이도 똑같은 탱크를 집고서는 성큼성큼 계산대로 걸어가서 계산을 치렀다.


어스름, 어두움이 내린 저녁 시간에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효성이와 나는 한 손에 장난감 박스를 하나씩 들고, 역전 계단을 내려왔다. 효성이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자리를 피해 주었고, 친구하고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떡볶이와 어묵만으로도 만족인데, 내 생일도 아닌 자신의 생일에 덩달아 나까지 선물을 사주었던 효성이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른이 돼야지만 느끼고 행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 봐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어떻게 열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간혹,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효성이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흔치 않은 경우지만 애써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효성이 같은 사람이 한두 명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주는 사람, 나는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이지만, 가족 이상으로 내게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낌없이 받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오롯이 받아주기에 물질이든 마음이든 주고 싶은 것일 테니까 말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나를 줄곧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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