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시작하니 하루하루가 과제와 수업의 연속이었다. 특히 필수 과목 중에는 낮에만 열리는 수업도 있어, 반차를 쓰거나 일찍 퇴근 후 다른 날 근무 시간을 채우는 일이 잦았다. 다행히 당시 회사는 탄력근무제와 비포괄임금제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월 단위 근무시간만 채우면 되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일찍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며 하루하루를 채웠다. 눈 깜짝할 새 일주일, 한 달이 지나고 어느새 1년이 흘렀다. 바쁘게 지내니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미래를 고민하기엔 눈앞에 해야 할 일이 늘 쌓여 있었고, 내 두 발은 늘 현재에 붙들려 있었다.
석사 과정을 경험한 덕에 대학원 생활, 특히 파트타임 대학원생의 삶은 낯설지 않았다. 논문은 여전히 넘기 힘든 큰 산처럼 느껴졌지만, 회사에서의 문제의식이 쌓이며 연구 주제로 떠오르는 순간들이 많았다. 주제를 잡고 탐구하는 과정은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회사 생활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던 상사의 결정이나 조직의 방식이 불만으로만 남았지만, 이제는 연구의 소재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회사는 ‘논문 주제 밭’이었다. 또 회사 경험은 수업에서도 도움이 됐다. 이론을 배우면 현장의 사례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이를 공유하는 것은 수업 기여로 이어졌다. 공부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실무와 학문이 맞물리며 전공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쌓여갔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퍼런스 Korea Summit에서 패널토의자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외부 활동 경험이나 노출이 거의 없던 내겐 뜻밖의 기회였다. 주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게 연구하던 리더십이었지만, ‘팀장도, 박사도 아닌데 나서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컸다. 잘해내고 싶은 마음 반,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진 않은 마음 반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 조직에는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약 두 달간의 준비는 쉽지 않았다. 난생처음 축농증에 걸리고 몸살까지 앓았지만, 머릿속은 온통 15분 남짓의 발표 준비로 가득했다. 발표 당일, 곳곳에 내 얼굴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팀 동료들도 응원차 찾아와 주었다. 이 주제로 수다떨기만 좋아했지,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게 내용을 정리하고 짧은 시간안에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돌아보면, 다시 준비한다고 해도 이 이상은 어려울 만큼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돈이나 명예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순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 자신에게 유난히 엄격한 그 기준이 나를 그렇게나 힘들게 하면서도 여기까지 데려온 힘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컨퍼런스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수업과 논문, 회사 일을 이어갔다. 그러나 곧 회사 경영이 악화되면서 팀 업무는 반으로 줄고, 인원 감축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는 어수선했고 불행 중 다행인건 나의 마음은 그 전부터 더 어수선했다. 내가 속한 조직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 따분해졌달까. 회사는 결국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공지했고, 다행히 나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누군가에겐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겠지만, 내게는 다시 오기 힘든 기회였다. 서른 일곱, 그렇게 또 한 번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37살에 희망퇴직을 했다
희망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곳에 이직을 했다. 실업급여 수급기간의 반의 반도 지나지 않던 시점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 덜컥 수락을했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과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 이상의 대우였지만, 어이없게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난 퇴사를 결정하게 됐다. 30대 후반, 퇴사 바람이 분다
이번 퇴사는 내 인생의 마지막 퇴사로 생각한다. 이직을 위한 퇴사가 아니라, 내 일을 하기 위한 퇴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의 내가 아닌, 어떤 모습으로의 내가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시간으로서 1년을 보내기로 했다. 퇴사한 이유
퇴사 후의 삶, 요즘 나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자주 마음이 뒤섞인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고, 하고 싶은 일을 붙들면 해야 할 일이 밀려왔다. 집중이 흐트러지고 흘려보낸 시간이 쌓이면, 제자리에 멈춰 선 듯 불안이 밀려왔다. 예상했던 감정이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두렵기도 했다. 뒤죽박죽 퇴사 이후의 하루
하지만 이제는 이런 하루도, 이런 감정도 괜찮다는 용기가 든다. 불안과 조바심이 밀려와도 다시 나아질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일까. 40대의 내가 돌아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너무 애쓰지 마. 내 것이면 내게 올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면 감사히 오지 않을테니까!'
돌아보면 내 인생은 늘 변화의 연속이었다. 수차례의 이직, 한 번의 이혼, 그리고 희망퇴직. 잔잔히 흘러간 적 없는 20대와 30대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앞으로의 변화도 두렵지 않았다. 변화란 결국 내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일, 적응하면 일상이 될 일일 뿐이다. 그 순간엔 두렵고 공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한 줄의 문장으로 남는다.
가끔 TV에 몰디브가 나오면 ‘내가 정말 저기 살았던가’ 싶다. 태국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까맣게 탄 얼굴로 현지인처럼 길거리에서 쏨땀과 맥주를 즐기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나는솔로’ 돌싱편을 보며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음을 떠올리지만,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이란 결국 왜곡되기도, 잊히기도, 때론 더 크게 부각되기도 하는 법이다.
<다음의 사람> 연재편을 통해 나의 지난 시절들을 기록하며 나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안과 공허 속에서 애쓰던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까지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나 역시 언젠가 미래의 내가 돌아봤을 때 그렇게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다음의 사람〉은 인생의 전환과 성장을 다루며,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연재 시리즈입니다.